도산 안창호 선생- 2024. 10. 11.
제가 살고 있는 압구정동에는 도심 한복판에 자그마한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 공원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산책도 하고 가벼운 운동도 합니다. 공원의 이름은 ‘도산 공원’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고 이 공원 안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기념관도 있습니다. 저도 이따금 이 공원을 찾아 산책을 합니다. 그리고 기념관에도 들어가 이런 저런 기록물들과 사진들을 들여다봅니다. 제가 이 공원의 기념관에 들리는 이유는 그 곳에 전시된 사진들 가운데 저의 작은 조부(祖父)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은 조부 존함은 일강 (一江) 김철 (金澈) 선생입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24. 5. 31. 참조)
제가 알기로는 저의 작은 조부 일강 선생과 도산 선생은 초기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나중에는 두 분의 사이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강 선생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주요 자금 공급원으로서 일강 선생의 재가 없이는 임시정부의 재정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고 합니다. 상해 임시정부가 하는 거의 모든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일강 선생이 제공하거나 그가 관리하는 자금에서 지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도산 선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일강 선생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도산 선생에 대하여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도산 선생의 주변에 당신의 출생지역인 평안도 출신들로 소위 서북파(西北派)를 형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도산 선생은 평안도 출신들을 중용하면서 스스로 ‘서북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임시정부 한 곳에 역량을 집결하여 진력하여도 힘이 부족할 상황에 도산 선생은 흥사단(興士團)과 같은 새로운 외부 조직을 만들어 단결력을 저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임시정부 내부에도 파벌이 갈려 갈등이 생기곤 하였는데, 도산 선생이 외부에 또 다른 조직을 만드는 것을 일강 선생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도산 선생의 자금 지원 요청에 일강 선생은 거절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에 따라 도산 선생도 불만을 토로하면서 일강 선생과 도산 선생은 사이가 썩 좋지만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분의 사이가 불편해지면서 일강 선생은 자신의 양자(養子)이자 친조카인 저의 선친- 구봉(九峰) 김석(金晳) 선생-에게 지시하여 상해 교민 신문에 “도산은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다”라는 글까지 게재하게 됩니다. 그 이후 도산 선생은 도미(渡美)하여 미주 지역의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리고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가담한 혐의로 도산 선생은 일본 헌병에 붙잡힙니다. 체포된 도산 선생은 재판 과정에서 당신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는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5년 형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가 약 2년 반 후에 가석방됩니다.
도산 선생은 훌륭한 애국자이시고 사상가이시며 독립운동가셨습니다. 도산 기념관에 가면 도산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여러 기록물들이 있고 사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도산 선생이 일강 선생과 그리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산 기념관 안에서는 일강 선생의 모습을 여러 사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매우 잘 알려진 사진으로 독립운동 사료(史料)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뒷줄 맨 왼쪽에 계신 분이 일강 선생이십니다. 앞자리 가운데 흰색 원 안에 계신 분이 도산 선생이십니다. 그리고 앞줄 왼쪽에 계신 분이 훗날 이승만 대통령에 대적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선거 운동 중에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해공 신익희 선생이십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선거 구호의 주인공이었던 바로 그 해공 신익희 선생이십니다.
위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일강 김철 기념관에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맨 앞줄 왼쪽에서 4번째, 도산 선생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일강 선생입니다.
이 사진의 앞에서 두번째 줄 맨 왼쪽에서 두번째 자리에 계신 분이 일강 선생입니다. 그리고 맨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백범 김구 선생이십니다. 도산 선생은 흰색 점선 원 안에 계십니다.
이 사진의 아래 부분에서 한 가운데 긴 코트 차림으로 왼팔에 검은 색 상주 완장을 차신 분이 일강 김철 선생이십니다.
현재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 사업회의 관계자 분들도 도산 선생이 일강 선생과 그리 좋은 관계만은 아니었음을 알고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 선생의 기록 사진 곳곳에 일강 선생이 함께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일강 선생께서 생전에 계실 때에는 임시 정부의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임시 정부의 여러 활동을 기록하는 사진에 일강 선생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강 선생은 1933년 조카이자 양자인 저의 선친 구봉 김석 선생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고 당신에 대한 체포령이 발령되자 황급히 상해를 떠나 항저우로 피신을 합니다. 그 곳에서 임시 숙소를 정하고 일강 선생의 숙소에 임시 정부 사무실을 개소합니다. 그러다가 과로로 인하여 쓰러져 입원을 하게 되고, 병원에서 끝내 회복을 못한 채 1934년 6월 일생을 마감합니다.
도산 선생은 윤봉길 의사 의거와 관련하여 5년 형을 선고받은 뒤 수감중 2년 반 만에 가석방되었다가 1937년 다시 체포되어 구금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38년 쇠약해진 몸으로 가석방된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은 일강 선생의 고향인 전라남도 함평에 있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 아래에 있을 때에 독립을 위하여 애쓰신 분들을 기리기 위하여 시간 나실 때에 두 분의 기념관을 한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함평까지 다녀오는 것은 시간적으로 다소 무리가 따를 수 있겠으나 신사동을 다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족.
한동안 일강 선생과 도산 선생의 사이가 서먹하였던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두 분이 화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저희 집으로 자주 찾아오셔서 저의 선친과 바둑, 마작 등을 즐기셨던 선친의 친구분이 두 분 계셨습니다. 노태준 선생님과 구익균 선생님이십니다. 노태준 선생님은 독립군 지대장을 역임하시고 뒷날 철기 이범석 장군의 비서를 하셨습니다. 이범석 장군이 국무총리 재직 시절에는 비서실장을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구익균 선생님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를 지내셨고 도산 선생의 임종을 지키셨던 최측근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노태준 선생님과 구익균 선생님은 저희 집에 자주 오셔서 식사도 하시고 약주가 거나해지시면 저의 선친과 세 분이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시며 크게 웃으시곤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도산 선생의 비서이셨던 구익균 선생님과 허물없이 지내셨다는 것은 제 선친의 양부(養父)이신 일강 선생이 도산선생과 화해하셨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태준 선생님은 저의 선친보다 먼저 돌아가셨지만, 구익균 선생님은 저의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문상 오셔서 두 무릎을 꿇은 채로 한 동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