告白 II - 2024. 5. 31.
저도 이제는 노인이 된 것인지 친구들과 어울리면 지나간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최근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저의 선친 관련 이야기를 썼던 제 칼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 금요일 모닝커피 - 2024. 3. 22. . 참조) 제 친구들이 저의 선친 이야기를 좀 더 들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날 제가 제 친구들에게 하여 주었던 저의 선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의 조부(祖父) 대(代)에는 3 형제 분이 계셨습니다. 저의 선친은 조부 삼 형제의 가운데인 둘째 할아버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의 친조부께서는 저의 선친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선친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선친은 태어나자 마자 큰 집으로 양자를 갔습니다. 그 당시 저의 조부 집안은 호남지방에서 알아주는 만석(萬石)꾼이셨다고 합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저의 조부께서는 두루마기 안 주머니에 나락(아직 탈곡을 하지 않은 벼) 백석(百石) 혹은 천석(千石) 짜리 어음을 여러 장 가지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수천만 원, 수억 원쯤 하는 수표를 여러 장 가지고 다니신 셈입니다.
제가 선친에게서 들은 또 한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어린 시절에 양부(養父)이신 저의 조부(祖父)를 모시고 마실을 다녀오던 중에 소변이 급하여서 잠시 소변을 보겠다고 여쭈었답니다. 그러자 조부께서는 저의 선친에게 “소변은 거름이 되니 길에다 보지 말고 논에 보거라” 하셨답니다. 그래서 저의 선친께서는 어린 마음에 “그렇다면 우리 논에 보겠습니다. 어느 논이 우리 논입니까?” 하고 여쭸답니다. 그러자 조부께서 하신 대답은 “여기 보이는 논은 다 우리 논이다. 아무 논에나 봐도 된다.”고 하셨답니다. 그렇게 부농(富農)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의 선친께서는 참으로 기구하게도 유복자로 태어나신 것도 모자라 불과 9세의 나이에 양부마저 세상을 떠나십니다. 삼일 운동이 일어난 해였다고 합니다. 양부의 3년 상을 마치고 12세 되는 해에 저의 선친은 또 다시 막내 조부에게 양자를 들게 됩니다. 저의 막내 조부는 현재 전남 함평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일강(一江) 김철(金澈) 선생이십니다. 그 당시 일강 선생은 상해 임시 정부의 요인(要人)으로 임시 정부의 재정에 막대한 지원을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상해로 양자를 간 것입니다.
임시 정부에서 독립 운동을 하시던 분들은 훌륭한 정신과 의지를 갖춘 분들이시지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강 선생은 호남의 만석꾼 집안 자제로서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임시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재정을 도맡아서 지원하셨다고 합니다. 일강 선생의 재력을 보여주는 한 예가 있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에서는 대부분의 문서를 펜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잉크를 찍어서 펜으로 쓴 문서는 처음에는 잉크 색이 짙지만 계속 쓰다 보면 잉크 색이 흐려지고 다시 잉크를 찍어서 진한 색의 글씨가 시작되곤 합니다. 그런데 유독 일강 선생이 작성한 문건은 잉크 색깔이 일정하였다고 합니다. 일강 선생은 상해 임시 정부 인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만년필을 가지고 계셨고, 그 만년필로 문서를 작성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만년필은 매우 비싼 고급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일강 선생의 본명은 김, 영자, 탁자(金永鐸)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가명으로 김, 철자(金澈)를 쓰셨습니다. 때로는 김중청(金重淸)이라는 가명도 쓰셨고, 그 이유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본의 손아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일강 선생과 저의 선친은 모두 중국 국적을 획득하기도 하였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의 재정을 도맡아 지원하시던 일강 선생에게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32년 상해 홍구 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 의거 때입니다. 그 당시 이미 일본 경찰과 헌병의 여러 밀정(密偵)들이 임시 정부에 잠입하여 위태로운 상황이 자주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위하여 폭탄을 구입하는 극비 사항은 철저히 보안에 부쳐지고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을 맡겨야 했습니다. 폭탄 구입 자금을 제공하는 일강 선생의 입장에서는 가장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양아들이자 조카인 저의 선친이었습니다. 일강 선생은 저의 선친에게 현금을 주시면서 중국 국민군의 장성인 왕웅(한국명 김홍일) 장군에게 대금을 전달하고 폭탄을 직접 수령하여 오게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후에 저의 선친께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상해 폭탄 사건 공범’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래 신문 기사 사본 참조, *주: 기사에는 저의 선친 함자가 ‘金晢’(김절)이라 잘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표기는 ‘金晳’ (김석)입니다.)
( 김석문제를중심으로 일중불삼각분쟁야기-1933년 12월 14일 동아일보 )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고 1933년 저의 선친께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습니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이 피살되었다는 이유로 경찰이 아닌 헌병이 나서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던 것입니다. 자신의 양아들이자 조카인 저의 선친께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히자 일강 선생은 황급히 상해를 벗어나 항저우(杭州)로 피신하였습니다. 일강 선생이 항저우에서 급하게 구한 숙소에 임시 정부의 집무실을 차렸고 그 곳에서 임시 정부의 일을 보다가 과로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관련기사: ○○黨幹部 金澈 돌연 서거-1934년 7월 11일-동아일보 , *주: 기사 내용에는 ‘김철 38세’라고 하나 실은 ‘48세’가 맞습니다. 1886년생이십니다.)
일강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고향의 전답, 가옥 등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고 합니다. 항일 운동의 중심 인물이고 그 후손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폭탄을 전달한 인물이니 일본 사람들이 그 집안을 가만히 놓아 둘 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광복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셨고 그 때 고향에 내려가 보니 집도, 논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저의 선친께서는 중국 상해에 계시는 동안 중국말을 익히셨고, 영국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 *주: 영국에서는 public school은 사립학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에서 영어로 교육을 받아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실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자산이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그런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무역업에 진출하셔서 가정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재산은 물려주지 못하더라도 교육은 받게 해줄 테니 네 손으로 가정을 일구어라.”
그래서 저는 저의 선친에게서 물려 받은 재산 하나 없이 저의 손으로 제 가정을 일궜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