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선친께서는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고배를 드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궁극적으로는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으셨습니다.
첫번째 출마는 4.19 혁명 직후 소위 7.29 선거입니다. 제2 공화국 국회는 민의원 (하원에 해당)과 참의원 (상원에 해당)으로 나뉘어 양원제(兩院制)를 택하였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민의원으로 출마하셨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합니다. 선친께서는 그 당시 짚(Jeep) 차를 타고 선거운동을 하러 다니셨습니다. 저도 몇 번 따라다닌 적이 있습니다. 차를 세우고 짚 차 앞의 본넷 위에 마이크를 세우고 차 지붕에 스피커를 두 개 달았습니다. 그리고 본넷 위에 저의 선친께서 올라서서 연설을 하셨습니다. 저희 선거 운동원들이 박수를 치며 청중의 호응을 유도하였고, 저의 선친께서는 열정적인 연설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설이 끝나면 짚 차의 뒤에 츄레일러(trailer. 짐을 싣고 다니는 용도로 차 뒤에 끌고 다니는 짐칸)에서 가마니를 하나 꺼냅니다. 그러면 모여 있던 군중이 그 가마니 앞으로 모두 달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룹니다. 가마니 안에는 고무신이 들어 있었고, 고무신의 짝을 제대로 맞추지도 않고 아귀다툼을 하듯 서로 고무신을 챙기려고 몸 싸움을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저는 고무신을 차지하려고 악을 쓰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이상하기도 하였고 보기에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선친께 고무신을 꼭 저런 식으로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지 여쭤 보았습니다. 그러자 저의 선친께서는, “저렇게라도 나누어 주어야 욕을 먹지 않는다. 상대방 후보도 모두 고무신을 돌리는데 아버지가 안 돌리면 저 후보는 고무신도 안 준다고 하며 아무도 아버지에게 표를 찍지 않을 거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무신을 받았다고 표를 찍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그마저 고무신도 돌리지 않으면 아예 표를 찍을 대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고무신 선거’의 현장이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첫 선거 도전을 무소속으로 하셨고, 그 당시 집권당인 민주당 후보에게 패하셨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신 것은 소위 민정이양(民政移讓) 선거였습니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시작한 이후 그가 약속한 민정이양을 위하여 1963년에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 때의 선거에서는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저의 선친께서는 야당 후보로 출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고배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두 번의 선거에서 저의 선친을 도와 선거운동 내내 비서 역할을 하셨던 분은 이진연씨(이진연)였고, 이 분은 후에 국회의원에 도전하여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진연씨의 친척 동생이 최근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 전 국무총리 이낙연씨입니다.
저의 선친께서 두 번의 선거에서 치른 선거비용은 실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첫 선거에서 패하였을 때 저의 선친께서는 스스로 위축되지 않았음을 보이시려고 더욱 당당하게 행동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애써 한 가지 변화를 찾자면 사무실을 반도호텔에서 상공회의소 빌딩으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공회의소 빌딩은 지금의 시청앞 한화빌딩 자리입니다. 조선 호텔 건너편에 경남극장이 있었고 바로 옆에 상공회의소 빌딩이 있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사무실을 옮긴 이유는 반도호텔에 있던 선친의 사무실 반도호텔 201호실이 국무총리 집무실로 쓰이게 되어서였습니다. 제2 공화국은 내각책임제 정부여서 국무총리가 국정의 책임자로 집권하게 되었고, 국무총리로 선임된 장면 총리가 자신의 사무실을 반도호텔에서 가장 큰 사무실인 201호로 정하였습니다. 그 당시 201호를 사용하고 계시던 저의 선친께서는 사무실을 비워 주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구한 사무실이 상공회의소 빌딩 1층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960년 가을 저의 선친께서는 사무실을 반도호텔에서 상공회의소 빌딩으로 옮기셨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장면 총리를 내심 탐탁치 않게 여기셨습니다. 당신의 사무실을 빼앗긴 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선친께서 제게 말씀해 주신 이유는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동차입니다. 저의 선친께서 당시 미국 GM 자동차의 한국 에이전트를 하시고 계셨고, 1953년 대통령 전용차량 캐딜락, 1954년 부통령 전용차량 뷰익 등을 모두 저의 선친께서 수입하셔서 정부에 납품하셨습니다. (대통령 전용 차량은 1956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탄 차량- 캐딜락-으로 선물하면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1959년 장면 부통령이 당선되면서 자신의 전용 차량을 1959년 뷰익 일렉트라 225(뷰익 일렉트라 투 투 파이브 사진)로 바꾸었고, 그 차도 저의 선친께서 수입하여 공급하셨습니다. 이 때 저의 선친께서는, “가난한 나라에서 부통령이 자신의 전용 차량으로 불과 5년 밖에 안 된 차량을 새 차로 바꾸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9. 5. 31. 참조) 그리고 1961년 장면 총리가 집무실을 반도호텔에 마련하는 것을 보시고, “한 나라 정부의 책임자가 미군 휴양 시설 안에 집무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양새가 아주 좋지 않다”며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두 번째 선거에서 낙선하신 다음에는 저의 집 안에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우선 저의 선친께서 타고 다니시던 차가 바뀌었습니다. 선친의 자동차는 그 때까지는 1954년 뷰익이었습니다. (1954 뷰익) 10년간 아끼며 타시던 뷰익을 파시고 새로이 짚 차를 장만하셨습니다. 그 당시 짚은 미군이 세계 제2차 대전 또는 한국 전쟁 때부터 사용하던 것을 불하하는 형식으로 매각하는 것을 매입한 것입니다. 짚 차는 모두 소프트 탑 차량이어서 지붕이 없고 캔버스 천으로 지붕을 덮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짚 차량 위에 드럼 통을 각목으로 두드려 펴서 사각 모양의 탑을 만들어 씌워서 타고 다녔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길 위에 굴러 다니는 짚 차는 모두 드럼 통을 펴서 만든 탑을 얹은 짚 차량이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타시던 차도 그런 짚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저의 선친의 사업은 그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여 지희 집 안 경제 상황은 안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마약’이라는 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집안의 경제 상황이 안 좋은 가운데에서도 저의 선친께서 1967년 선거에 다시 한번 도전하시겠다고 나서셨습니다. 야당에 공천 신청을 하시고 공천 헌금도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공천 헌금을 공공연히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의 선친께서는 공천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 이후 저의 선친께서는 자조적인 어조로 “나의 정치 경력은 두번의 낙선(落選)과 한 번의 낙천(落薦)”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의 낙천이 결정적이었던지, 저의 선친께서는 타고 다니시던 짚 차 마저도 처분하셨습니다. 그리고 한남동에 있는 대지 400평에 건평 70 여 평의 멋드러진 집을 팔고 원효로와 효창동 사이에 있는 용문동에 대지 40평에 건평 40평의 자그마한 주택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이후 저의 선친께서는 반도 호텔에서 제일 큰 사무실에서 근무하시며, 커다란 뷰익 차의 뒷 자리에 앉아서 이동하시는 호사를 다시는 못 누리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로 옆에서 모두 지켜 보신 저의 모친께서 생전에 저에게 남기신 당부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절대로, 절대로 정치에 발 들여 놓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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