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역사의 교훈- 2024. 6. 14.

jaykim1953 2024. 6. 14. 06:05

지난 주,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의 칼럼을 읽고 있다는 인사와 함께 최근 저의 선친과 숙조부(叔祖父) 이야기를 다루었던 칼럼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 시게미쓰 마모루( 시게미쓰 마모루-wikipedia.org 참조)알아요?”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에, “몰라, 누군데?”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신이 나서 시게미쓰 마모루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유투브에서 ‘Japanese sign final surrender in 1945’ 검색하면 세계 2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미국 해군 미주리 (USS Missouri)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 (Japanese sign final surrender- 1945)저도 동영상을 찾아보았습니다. 2분쯤 경과한 시점에 화면에는 일본 대표단이 쪽배를 타고 미국 해군 미주리 함에 승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면에서 나레이션은 ‘Surrender party arrives. They are headed by agent Mamoru Shigemitsu foreign minister of the Japanese surrender cabinet who was wounded by a Korean patriot in Shanghai years ago and walks on an artificial leg.’ 이라고 나옵니다. 이를 우리 말로 옮기면, ‘항복단이 도착합니다. 일본 항복 내각의 외무대신인 마모루 시게미쓰 (*: 원래 이름은 시게미쓰 마모루이나 영어식으로 이름-성으로 순서를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이끌고 있으며, 그는 샹하이(上海)에서 한국의 애국 청년에게 부상을 당하여 의족(義足) 의지하여 걷고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일본의 내각을 대표하여 항복 문서에 서명하려고 나온 사람은 외무 대신 시게미쓰 마모루입니다. 그는 1932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당시 일본의 주중국공사(駐中國公使) 자격으로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자리에서 그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맞고 오른쪽 다리를 잃어 이후 죽을 때까지 의족에 의지하여 걸어야 했습니다.

 

(엎드려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항복 내각의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후배는 이야기를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면서 형님의 아버지, 작은 할아버지께서 시게미쓰 마모루의 다리를 폭탄으로 부러뜨려서 혼내 주신 겁니다.”라고 통쾌한 마음을 한껏 털어놓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유투브 동영상 뉴스에서는 한국의 애국자’ (a Korean patriot)라고 이야기하였지만, 우리는 애국자가 윤봉길 의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배는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전달해 주었던 저의 선친과, 폭탄 구입 자금을 마련하고 거사를 주도하였던 저의 숙조부의 이야기를 알고 있기에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미 알고 있던 사건- 해군 미주리 함상에서의 일본 항복 문서 서명-이지만 그에 연관된 다른 사연들을 알게 되면 지난 일들이 새롭게 깨우쳐지기도 합니다. 최근에 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지금부터 52 , 우리나라 금융에 엄청난 충격을 사건이 있었습니다. 1972년의 8.3. 조치입니다. 8.3 조치의 정식 명칭은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이고 주요 내용은 국내 기업에 빌려준 모든 사채를 일시에 동결하여 은행에 등록하여야 하고 등록하지 않은 사채는 기업이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등록된 사채는 은행 대출 금리를 적용하고 3 거치 5 분할 상환하도록 하였습니다. 일시에 이자율이 1/3 줄어들게 되어 기업에게는 구세주, 사채 이자로 생활하는 전주(錢主)에게는 재앙과 같은 조치였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20. 11. 6. 참조)

당시 우리나라 기업의 금융 관행이 오늘날의 관행과 다른 특이한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기업의 자금 동원이 금융기관보다는 사채 시장에서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매우 특이하게 사채업자들은 기업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면서 기업의 대주주- 소위 오너(owner)- 개인에게서 어음을 받고 개인간의 사사로운 금전 거래 형식을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신고된 사채는 주로 대기업 오너의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 8.3 조치로 인한 사채 신고에서 거액의 사채를 신고한 기업가들은 최종건(선경그룹), 정주영(현대그룹), 이병철(삼성그룹), 구자경(럭키그룹), 조중훈(한진그룹) 등이었습니다. 가운데 제가 새삼스럽게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이름은 최종건 선경 그룹 회장입니다.

최종건 회장은 키가 6(180쎈티미터) 장신이라 불렸으며 인간관계가 원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입사한 선경직물을 해방 직접 인수하여 선경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회사를 키웠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며 열악한 기업 환경 속에서도 사채를 끌어들이며 사업을 이어 갔습니다. 그리고 8.3 조치를 통하여 어려움을 극복한 직후 다음해인 1973 폐암으로 이른 나이(48)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후 선경을 이어받은 사람은 최종건 회장의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었습니다.

형의 사업을 이어받은 최종현 회장은 선경 그룹 안에서는 거의 창업주 수준의 지위를 인정받으며 사세(社勢) 키웠습니다. 대통령 일가와 사돈을 맺으며 정경유착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이동 통신 주식회사를 인수하자 대통령과의 인척관계를 들먹이며 정계(政界)에서 반발하는 바람에 이를 포기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이동 통신 주식회사의 재입찰 과정에서는 당시에 재계 원로들이 의리를 앞세워 선경 이외의 재벌 회사는 입찰에 불참하였습니다. 결국 최종현 회장의 선경이 낙찰 받아 이동 통신 사업에 진출하게 되었고 오늘의 SKT 있게 되었습니다. 최종현 회장은 성격이 급하고 소신이 뚜렷한 반면, 미국 유학을 통하여 화학 석사와 시카고 대학 MBA까지 마치는 상당히 학구적인 면도 있고 논리적이어서 직원들은 물론 재계의 원로들과도 다양한 토론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의 인맥과 평소 주변 관리 덕에 이동 통신 사업의 재입찰에서 선경이 성공할 있었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최종현 회장도 그의 형보다는 오래 살았다고는 하나 아쉽게 이른 나이(68)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종건 회장과 최종현 회장의 뒤를 이어 SK그룹의 수장으로 떠오른 최태원 회장은 요즈음 조금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노소영과 혼인 존중 "…판사가 질타-hankookilbo.com- 2024. 5. 31.) 시중에는 그의 이혼과 관련된 위자료와 재산 분할에 대하여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판사의 판결이 지적하는 행간의 내용은 재벌이라 하여도 혼인의 순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배우자를 탓하는 것에 대한 징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최태원 회장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SK임직원이 상처받은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임직원에 고개 숙인 최태원 "SK 자부심에 상처"-SBS Biz- 2024. 6. 3.) 실질적인 피해자로 보이는 자신의 가족과 배우자에게는 전혀 사과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부와 국민의 뒷받침 속에 성장하였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웠을 때에 8.3 조치와 같은 정부의 도움이 있었고, 주변의 재계 인사들이 의리를 지켜주었기에 오늘의 SK 있을 있었음을 부인하여서는 됩니다.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고 알게 모르게 신세 졌던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작금의 최태원 회장과 관련된 기사들은 기사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불편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