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여러 유명 인사들의 사망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최초의 기상 캐스터였던 김동완 통보관 (관련기사: “파리도 졸리는 더위입니다”…‘1호 기상캐스터’ 김동완 별세-joongang.co.kr- 20024. 9. 19.), 그리고 재야 정치인 장기표 씨 (관련기사: "민주화운동 보상금? 말이 되나" 10억 거부한 장기표의 소신-joongang.co.kr- 2024. 9. 23.) 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1970년대말에 한미관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코리아 게이트의 주인공 박동선 씨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관련기사: 1970년대 한미관계 뒤흔든 ‘코리아게이트’ 핵심인물 박동선 씨 별세-munhwa-2024. 9. 20.)
박동선씨는 한국전쟁 중에 7살 위인 그의 형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의 형은 그 보다 일찍 대학을 마치고 먼저 국내로 돌아와 그의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부친이 사망하자 회사를 이어받았습니다. 박동선씨는 부친이 사망할 때에도 아직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였고 그의 형의 도움을 받아 계속 미국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도 매우 사교적이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어 미국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친분을 쌓아갔습니다. 그의 사교적인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그가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는 것과 백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시기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미국 대학의 학생회장을 역임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발생하였던 부친 기업의 경영권 다툼도 일조하였습니다. 박동선 씨의 부친은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두번째 부인을 얻어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첫번째 아들은 박동선 씨의 형 박건석 회장이고 둘째 아들이 박동선 씨입니다. 박동선 씨 부친이 사망하자 첫번째 부인에게서 출생한 큰 아들이 경영권을 차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두번째 부인인 박동선 씨의 어머니와 박동선 씨의 형인 박건석 회장이 한 편이 되어 첫번째 부인의 아들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부인의 아들이 미세하나마 지분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장자로서 직원들의 지지를 받아 경영권을 장악하려 하였습니다. 그 때에 박동선 씨의 어머니는 박동선 씨에게 유산으로 받은 지분을 동원하여 박동선 씨의 친형인 박건석 회장을 지원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반대 급부로 박동선 씨가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에 경제적으로 조금도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박동선 씨가 자기의 친형 편을 들고 배다른 형에게 반기를 들면서 경영권 다툼은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박건석 회장이 경영권을 확보한 회사가 미륭상사입니다. 그리고 미륭상사가 발판이 되어 박건석 회장은 훗날 범양전용선이라는 국내 최대의 선박회사를 세우게 됩니다. 범양전용선은 설립 후 십여 년이 지나 이름을 범양상선으로 바꾸게 됩니다. 1980년대말 범양상선 회사의 비자금 문제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면서 박건석 회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맙니다. (관련기사: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 자살- khan.co.kr-1987. 4. 20.)
박동선 씨는 천부적인 친화력과 사교성을 바탕으로 미국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미국 정계의 고위급 인사들과도 가까이 지내게 됩니다. 그의 형 박건석 회장도 당시 정권 실세와 이런 저런 연줄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고, 1960년대 초반 한일협상 과정의 비사(秘史)에도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곤 하였습니다. 일부 언론 보도에 의하면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서울 성북동 자택 안에 있는 홈 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종락 한일은행 전무(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가 일본 쪽 밀사인 우노 소스케 의원을 만나 A4 용지에 타이핑된 4개 항에 합의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관련기사: 오키나와 핵 밀약- hani.co.kr- 2019. 10. 19.) 이 내용을 100%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기사 내용의 한일회담 당시인 1965년도에는 박건석 회장의 자택은 성북동이 아닌 가회동에 있었고, 1970년대 성북동 단지가 개발되면서 성북동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박건석 회장이 자신의 저택을 정부 고위 인사들의 만남의 장소로 제공하였던 일은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 고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던 박건석 회장은 그들을 그의 동생 박동선 씨에게 연결하여 주었고, 그렇게 코리아 게이트의 연결 고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70년대 말 미국 카터 행정부의 도덕 외교에 밀린 우리나라의 고위 정부 관리들이 어떻게 해서든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급한 마음에 박동선 씨를 앞세워 로비를 시도하였던 것이 코리아 게이트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박동선 씨는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여러 미녀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사귀었던 여성 가운데에는 미인 여배우도 있었습니다. 그 여배우는 훗날 박동선 씨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그가 운영하다가 파산한 기업을 되사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인사들을 끌어 들여 박동선 씨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과정에서 일이 꼬이며 송사에 휘말리기도 하였습니다. (관련기사: 최지희, 한남체인 인수 얼굴 마담- donga.com-1985. 7. 11.)
박동선 씨의 형인 박건석 회장의 이야기는 저의 칼럼에서 이미 다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7. 8. 18. 참조) 그는 일찍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그의 동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동선 씨의 조카이자 박건석 회장의 아들은 한 때 ‘콜라 독립’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그가 대주주로 있는 범양 식품을 통하여 코카콜라의 바틀링 비즈니스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음료 시장에 도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업이 부진해지면서 도피하듯 해외로 출국한 후 소식이 없습니다.
이제는 박건석 회장도 그리고 박동선 씨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전반적으로 불투명하고 어두웠던 시절에 있었던 재벌 기업들의 일면을 장식하였던 인물들입니다. 박건석 회장의 아들도 재기를 꿈꾸다가 사업이 여의치 않자 이를 접고 해외로 나갔습니다. 어둡고 불투명한 기업 경영의 관행은 없어져야 합니다. 장막 뒤에서 권모술수와 인맥으로 사업을 이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기업들도 밝고 투명한 경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더 이상 박동선 씨와 같은 불운한 사업가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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