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한국 프로 야구 코리안 시리즈가 끝이 났습니다. 4승 1패의 전적으로 싱거울 정도로 일찍 5 게임만에 끝이 났습니다. (관련기사: [영상] KIA 우승 축포…KS 불패 신화 ‘완성’- KBS.co.kr_ 2024. 10. 29.) 그리고 미국에서도 월드 시리즈에서 5 차전 만에 LA 다저스가 4승 1패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관련기사: MLB 다저스, 양키스 꺾고 월드시리즈 8번째 우승-yna.co.kr- 2024. 10. 31.)
우리나라는 금년에 프로 야구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하였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프로야구 1천만명 관중 키워드는…"원정팬·20대·여성"-yna.co.kr- 2024. 10. 17.) 참으로 엄청난 숫자의 관객입니다. 가장 관객을 많이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 잠실 야구장에 약 2만여 명의 관객이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1천만 명의 관중은 그야 말로 뜨거운 야구 인기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야구 경기를 보기 시작한 것은 1962년 그 당시 라이벌이 형성되었던 농협과 미창(미곡창고)의 경기를 보기 시작하면서입니다. 농협의 에이스 투수는 우완 오버 핸드 드로우 김청옥 선수이고 젊은 새로운 투수로 성동고등학교를 고교 대회에서 우승으로 이끌고 졸업하자마자 농협에 갓 입단한 우완 백수웅 선수가 새로운 에이스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백수웅 투수는 성동고 재학 시절 자신의 부친인 백효득 감독 밑에서 투수 겸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입니다. 부자가 감독과 선수로 있으면서 여러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당시 성동고를 국내 최강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던 선수입니다.
김청옥이라는 기존의 에이스와 새로운 젊은 에이스 백수웅 선수가 있는 농협에 맞선 라이벌 미창의 에이스는 요즈음 최강 야구에서 감독으로 뒤늦게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좌완 김성근 투수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프로 야구 시절에 투수를 혹사한다고 비판을 받았었지만 김성근 감독 자신도 선수 시절 투수로서 혹사당하였습니다. 일단 등판하면 투구수와 관계없이 완투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특별히 컨디션이 나쁘거나 상대방 타자들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지 않으면 끝까지 경기를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경기가 있으면 또 다시 등판하여 연투를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미창이 팀을 해체하고 미곡창고를 이어받은 대한통운이 야구 팀을 만들었으나 많은 선수들이 크라운 맥주 등 다른 팀으로 넘어갔습니다. 에이스 투수이던 김성근 투수는 기업은행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 우리나라 야구계에 커다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한 일본 국가대표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대표팀의 에이스 투수는 사이드 암 신용균 선수였습니다. 신용균 선수는 재일교포 선수로서 일본 사회인 야구 1부 리그에서 활약하던 선수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사회인 야구 2부 리그에서 잠시 뛰었던 것에 비하면 커리어가 더 나은 편이었습니다. 사이드 암 투수인 신용균 투수를 앞세워 우리나라는 강호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나름 강타선을 자랑하던 박현식, 김응룡, 박영길 등 타자들의 활약도 컸으나 야구에서 차지하는 투수의 비중을 감안한다면 신용균 투수의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야구가 196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의 우승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창 야구팀이 해체되고 대한통운으로 야구단이 시작하면서 새로운 팀의 에이스 투수로 신용균 투수가 자리잡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투수들의 단조로운 투구 패턴과는 달리 신용균 투수는 다양한 새로운 변화구를 소개하며 일약 최고의 투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에 고무되어서인지 그 다음해인 1964년 당시에 일본 프로 야구 난카이 호크스(南海 Hawks, * 현 후쿠오카 소프트 뱅크 호크스)에서 뛰고 있던 김영덕 투수가 귀국하여 크라운 맥주 팀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합니다. 그리고 1966년에 크라운 맥주 팀이 해체 되면서 한일은행 팀이 재창단하는 과정에서 한일은행으로 이적하여 국내 실업 최강팀 한일은행 야구단의 일원이 됩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국내 대학에 진학하였다가 1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 사회인 야구 2부 리그에서 선수로 뛰었던 김성근 투수가 우리나라 실업 야구의 강팀 미창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였고, 일본의 사회인 야구 1부 리그에서 뛰었던 신용균 투수가 국가 대표 에이스 투수로 군림하고 실업팀 통운에서 변화구의 달인 소리를 들으며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일본 프로야구 1군에서 뛰던 김영덕 투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실업팀 한일은행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면서 급기야는 퍼펙트 게임, 노힛트 노런 게임을 기록하고 방어율 0점대를 마크합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그 당시만 하여도 정통 오버 핸드 드로우 투수들이 에이스로 활약하고 기교파 사이드 암 투수들은 릴리프 투수로 쓰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이드 암 투수였던 김영덕 투수는 릴리프 투수로 쓰이면서 상대적으로 투구수도 많지 않아 어깨가 싱싱한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기교파 투수로 불릴 만큼 변화구에 능하였던 터라 국내에 들어와서 여러 변화구를 던지며 국내 타자들을 농락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야구는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를 1971년에 다시 한번 서울에서 개최하면서 우승을 하게 됩니다. 이 때에는 김영덕 선수가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국내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만큼 일본을 다시 꺾고 우승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던 차에 마침 일본 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阪急 Braves, *현 오릭스 버팔로스), 한신 타이거즈 (阪神 Tigers) 등의 팀에서 뛰었던 김호중 투수를 영입합니다. 이 당시 이미 플레잉 코치를 맡아서 코치 겸 선수로 뛰던 김영덕 코치가 자신의 일본 내 인맥을 통하여 김호중 투수를 한일은행의 에이스 투수로 영입하였던 것입니다. 김호중 투수는 강속구를 자랑하는 정통파 오버 핸드 투수였으나 제구가 안 잡히는 날에는 속수무책으로 볼 넷을 허용하고 난타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971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차 리그에서 우리나라는 최약체 필리핀에게만 겨우 이기고 일본, 대만, 호주에게 연패하여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사람이 김동엽 심판입니다. 김동엽 심판은 성균관 대학교를 졸업하고 조흥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부상과 경기력 저하로 선수 생활을 접고 심판으로 활약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김동엽 심판은 대회장에게 부탁하여 일본 경기의 심판을 자신이 맡겠다고 자청합니다. 이 당시 원래 우리나라 대표팀의 감독은 야구계 원로인 김영조 농협 감독이 맡고 있었으나 1차 리그에서 성적이 부진하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감독 자리를 내놓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실제로 김영조 감독은 그 당시 당뇨를 심하게 앓고 있었습니다. 김영조 감독은 포수 출신 우리나라 원로 야구인이며, 그의 아들 김승수 선수도 중앙고, 고려대를 나와 농협에서 포수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코치였던 김영덕 감독이 감독 대행을 맡아 경기를 치렀습니다. 이 때 김동엽 심판이 한 이야기가 여러 사람 입에 회자되었습니다. “나 하나 욕먹어서 우리나라가 우승할 수 있다면 내가 욕 먹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라고 하더니 실제로 심판 판정에서 소위 그 유명한 ‘별표 스트라이크 존’을 만들어 내고야 맙니다. 일본 투수가 던진 공은 한 가운데로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스트라이크가 안 되고, 우리나라 투수가 던진 공은 대강 스트라이크 존 근처에만 오면 다 스트라이크 콜을 하였습니다. 그 덕분인지 우리나라는 2차 리그를 전승(全勝)으로 마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이 때에도 김응룡, 강병철, 박영길, 김우열 등 강타자들이 활약을 하였지만 역시 김호중 투수의 역투가 가장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거기에 김동엽 심판의 도움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김동엽 심판은 1963년에도 국제심판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심판을 맡았었고, 그가 주심을 보았던 한일전에서 우리나라가 이겼습니다. 이 당시 김동엽 심판의 활약(?)에 대하여서도 뒷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1971년의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가 우리나라 국가 대표 유격수 하일 선수가 마지막으로 국가대표로 뛰었던 대회일 것입니다. 이 대회 이후에는 하일 선수가 유격수로 나오는 국가 대항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일 선수는 참으로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대표팀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운동장에서 낭랑한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1번 타자 숏 스탑, 하...일” 하고 방송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일 선수는 요즘 식 표현으로 강력한 ‘리드 오프’로서의 날카로운 타격과 안정적이고 폭 넓은 수비로서 오랫동안 대표팀의 붙박이 유격수로 활약하였습니다. (원조 국가대표 하 일, 야구역사에 대한 애정도 국가대표급-munhaknews.com_2021. 8. 17. 참조)
이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요즘의 프로야구 관객 천만 시대가 가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운동하였던 그 시절의 선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프로 야구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으로부터 60 – 70년 전 우리나라 금융의 태동기에 만약 지금과 같은 자본 비율을 적용하고, 리스크 관리 기준을 적용하였다면, 그 당시의 금융기관들은 고객을 상대로 금융 상품을 판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과 같은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지 않은 덕택에 그 때의 금융기관들- 특히 보험회사들은 고객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금융 상품을 판매할 수 있었고, 그렇게 성장하여 온 금융기관들이 지금의 우리나라 금융계를 이끌고 있습니다.
김영덕 감독, 김동엽 감독, 김청옥 투수 등 원로분들은 이미 많이 작고하셨습니다. 그분들의 노고가 쌓여 오늘의 프로 야구가 천만 관중을 끌어 모으듯이, 어려운 시절 우리나라의 금융계를 이끌었던 많은 선배분들이 어렵게 우리나라 금융을 키워 왔기에 오늘의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또 많은 분들이 은퇴하셨지만 선배 금융인들의 노고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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