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 공부를 안 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 미리미리 공부를 해 두면 시험 때가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그리 급할 것이 없이 평소에 하던 대로 공부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늘 그렇지 못하고 평소에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다가 시험에 임박하여서 벼락치기로 밀린 공부를 합니다.
저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항상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 공부를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중에 특히 성적이 가장 나빴던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 제가 가깝게 지내던 친한 친구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같은 반 친구 H입니다. 그는 저와 둘도 없는 단짝이었고 여름방학에 해수욕장으로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H는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하였고, 노래도 잘 부르고, 성격도 쾌활하고, 운동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성적은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H의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H는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습니다. 그런 H를 다시 만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18년쯤 되어서 광화문 네거리 한 복판에서였습니다. 제가 H를 우연히 만났을 때쯤 저의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H에 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꽤나 알려져 있었습니다. H가 동창들을 찾아와 어음을 맡겨 놓고 돈을 빌려 갔으나 어음 만기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고 어음은 부도가 났다는 것입니다. H에게 이런 방법으로 적게는 10-20 만원에서 많게는 수 백만원까지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화문 큰 길 한복판에서 H를 만난 저는 반가운 마음에 H에게 제 명함을 건네며 연락 한 번 하라고 하였습니다. 제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H를 만난 이야기를 하자 제 동창들은 저에게 ‘잘 생각하여서 H에게 얼마를 줄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충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의 우정을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H에게 얼마를 주어야 할지 고민하였습니다. 남달리 친한 친구였으니 다른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더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H를 길거리에서 만난 후 꽤 여러 달 동안은 지갑 속에 제 나름대로 적지 않은 금액의 수표를 준비하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H가 찾아오면 준비된 수표를 건네려고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H는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H는 저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친구였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겼고, 광화문 큰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지도 35년은 족히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친구 P가 있습니다. P는 저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을 하였었고 2 학년이 되어서는 반이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주말이면 저와 P는 곧잘 극장 구경도 함께 갔었고, 그 당시 시민회관(*주: 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던 공연장. 1972년 12월 화재사고로 건물이 무너졌고 그 자리에 현재의 세종문화회관을 지었음.)에서 공연하던 밴드(*주: 그 당시에는 그룹 사운드- Group Sound-라 불렀음) 공연을 보러 가곤 하였습니다. P는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이 강하였고 학창 시절부터 부조리와 비리를 보면 울분을 토로하곤 하였습니다. 게다가 P는 각종 무술을 연마하여 학교 안에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학교를 가는 날에는 H와 어울려 놀았고,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P와 외출하여 노느라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적은 자연히 떨어졌고 2학년 말에는 반에서 중간 정도- 60 여 명 가운데 30 등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3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2월 말의 봄 방학 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조심스럽게 저의 성적으로는 제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3학년으로 올라간 첫 날부터 저는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두 개씩 싸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들고 가서 점심과 저녁을 학교에서 먹으며 방과후에 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3년 가운데 2년을 놀다가 3학년이 되어서 벼락치기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3월말 첫 모의고사를 치렀습니다. 그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모의고사를 치른 후 전교생의 성적을 한 장으로 프린트하여 나누어 주었습니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였고, 제가 속해 있던 문과는 약 260 명의 성적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260명 가운데 1등부터 50등까지는 이름을 밝혀서 누구의 성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0등 이후의 성적은 해당 학생 본인에게만 어느 것이 자신의 성적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저의 첫 모의 고사 성적은 전교에서 30 등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이 성적표를 들고 가서 저희 어머니께 보여 드렸습니다. 그러자 저희 어머니께서는 깊은 한숨을 쉬시며, “이 성적으로 어떻게 네가 원하는 대학에 가겠니?”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의 석차가 반 석차 (班 席次)로 아셨던 것입니다. 저는 정색을 하며 저희 어머니께, “이 건 전교 석차예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제서야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시더니 웃음을 머금으시며, “수고했다. 앞으로 더 잘해라.” 하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 저는 꾸준히 성적을 조금씩 올려서 대체로 전교 10등- 15등 사이의 성적을 받았었고, 최고 성적은 전교 9등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2학년때까지의 성적을 보면 믿어지지 않는 3학년 성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런 벼락치기가 가능하였습니다. 저는 벼락치기에 성공하여 성적도 꽤 올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H와 P는 성적을 크게 끌어올리지 못하고 두 사람 모두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였습니다. 재수를 하고서도 1차 대학에는 다시 낙방하여 둘 다 2차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P는 언론사에서 근무하다가 훗날 대학원 공부를 마친 뒤 지방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지금은 은퇴하여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H는 35년 전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 그의 소식을 제대로 접할 수가 없었고, 간혹 들려오는 소식도 그리 밝은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행히 1년짜리 벼락치기 공부에 성공하여 단번에 대학에 진학하였고 그 이후 H나 P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H와 P는 1년짜리 벼락치기 공부에 성공하지 못하여 재수를 거쳐야 하였고, 그리고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같이 내신 성적이 중요하였었다면 아마도 저는 부실한 2학년 때의 성적 때문에 1년짜리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제가 공부하던 시절에는 벼락치기 공부가 통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의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면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지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증권업 면허를 위한 씨리즈 7 (Series 7) 시험도, 또 투자자문 면허인 씨리즈 66도 모두 불과 2-3 개월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합격하였습니다. 아마도 저의 인생은 벼락치기 공부의 연속인가 봅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富者減稅? - 2024. 8. 2. (2) | 2024.08.02 |
---|---|
아침 이슬- 2024. 7. 26. (3) | 2024.07.26 |
VIX 거래- 2024. 7. 12. (1) | 2024.07.12 |
잘 사는 나라- 2024. 7. 5. (2) | 2024.07.05 |
부동산 임대료- 2024. 6. 28. (2) | 2024.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