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비목 (碑木) -2019. 11. 15.

jaykim1953 2019. 11. 16. 13:57



제가 좋아하는 몇 곡의 가곡 가운데 한 곡을 소개합니다.


비목_ 쏘프 신영옥


이 노래의 가사는 ;


1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2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1960년대에 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작사자 한명희가 비무장 지대에서 우연히 발견한 무명 용사의 돌 무덤과 그 앞에 비석(碑石) 대신 나무로 십자가를 얽어 놓은 것을 보고 이 노래의 가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까지는 비목(碑木)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고, 당연히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았었으나 이제는 버젓이 국어 사전에 등재 되어 있습니다. 비석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하여 비목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1 절 첫 단어 초연(硝煙)은 소총에서 탄환을 발사한 후에 희미하게 피어나는 연기를 뜻합니다. 소총에서 피어나는 초연은 눈 여겨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희미한 연기입니다. 그러한 연기가 쓸고 간 깊은 계곡이라는 표현은 그 곳에서 얼마나 많은 전투와 총격이 있었을까 하는 처절한 전투의 은유(隱喩, metaphor)입니다.


2 절에 있는 궁노루는 사향 노루의 다른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작사자가 알려주는 궁노루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뭇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전방 비무장 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작사자는 자신의 소대원들이 어느 날 새끼 염소만한 궁노루 수 컷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향노루 수놈을 잡고 난 날부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홀로 남은 암놈이 매일 밤 울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슬프게 울어대는 회한을 어떤 필설로도 가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녀린 체구에 목이 멘 듯 캥캥거리며 애절하게 울어대며 며칠 밤이고 계속 되었답니다. 작사자는 그의 부대에서 이루어진 잔인했던 살상에 말 못할 회한을 느끼며 차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수정처럼 맑은 산간계곡에 소복한 누님 같은 새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그 놈도 울고 작사자 자신도 울고 철새도 날아다니며 따라 우는, 그야 말로 온 산천이 오열하였습니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처럼 흐르는 밤'이라는 가사에는 이러한 애를 끊는 듯한 서러움이 서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사자 한명희는 뒷날 그의 노랫말로 만들어진 비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장한 소회를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숱한 젊음의 희생 위에 호사를 누리면서도 순전히 제 잘난 탓으로 돌려대는 한심한 사람. 시퍼런 비수는커녕 어이없는 우격다짐 말 한 마디에도 소신마저 못 펴는 무기력한 인텔리. 풀벌레 울어대는 외로운 골짜기의 이름 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사람. 고향 땅 파도소리가 서러워 차라리 산화한 낭군의 무덤가에 외로운 망부석이 된 백목련의 통한을 외면하는 사람. 겉으로는 호국영령을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가련한 사람. 국립묘지의 묘비를 얼싸안고 통곡하는 혈육의 정을 모르는 비정한 사람. 숱한 싸움의 희생 아닌 것이 없는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 위에 살면서도 아직껏 호국영령 앞에 민주요, 정의요, 평화의 깃발을 한 번 바쳐보지 못한 못난 이웃들.

제발 그대만은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죽은 자만 억울하다고 초연에 휩싸여간 젊은 영령들이 진노하기 전에!"

이 비목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제가 군대에 있었던 시절에 TV에서 한진희, 장미희, 유지인, 홍세미 주연의 '결혼 행진곡' 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하였는데, 이 드라마에서 시도 때도 없이 가곡 비목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전 까지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비목이었으나 이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비목은 대한민국 국민 거의 모두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당시만 하여도 TV채널은 3 곳 뿐이었고, 같은 시간대에 모두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여 3 방송국 방영 드라마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인기가 있으면 나머지 둘은 머지 않아 막을 내려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반면 인기 있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게 높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곡 비목도 드라마의 인기 만큼이나 많은 이들에게 들려줄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목, 궁노루 등과 같이 일반 사람들이 흔히 접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맛깔나게 시어(詩語)로 활용한 작사자의 문학적 능력도 돋보입니다. 꼭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 가운데에서도 미쳐 깨닫지 못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 가운데 '찾다라는 말을 살펴 보면;


1.     수색하다. 영어로 seek, search 라는 뜻이 있습니다.

2.     발견하다. 영어로 find 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많은 분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더 있습니다.


3.     방문하다. (: 방학 때 시골 할머니 댁을 찾았다.)

4.     돌려 받다. (: 빼앗긴 땅을 다시 찾았다.)

5.     요구하다. (: 밤 늦게 들어와서 밥을 찾았다.)

6.     예금을 인출하다. (: 은행에서 돈을 찾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도 이렇게 다양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이 뜻을 영어로 표현하면 3 visit, 4 return, repatriate, 5 demand, 6 withdraw 가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어를 의미하는 English도 그 뜻이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England의 형용사, 또는 England 사람, 영어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당구의 비틀어 치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본어로 '히네루'-를 영어로는 English 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오른 쪽으로 비틀어 친다는 표현은 'Hit the ball with right English.' 라고 합니다.


금융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credit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신용 (信用) 또는 여신(與信)이라고 번역 되기도 하고, 쓰임새에 따라 조금씩 그 의미를 달리 하기도 합니다. 몇 가지 사용 예를 살펴 보면;


Credit rating - 신용 등급을 말합니다. 채권의 신용 등급이 AAA, AA, A 등과 같이 등급을 매기는 경우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Credit spread - 신용도에 따른 가산금리를 말합니다. 신용도가 낮은 채무자에게는 credit spread 를 많이 받고, 신용도가 좋은 채무자에게는 조금 받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Chief credit officer - 금융기관에서 신용분석과 여신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 책임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소액의 여신에 대하여서는 하급자에게 일부 권한을 위임하기도 하며, 여신 업무에 대한 궁극적인 최고 책임자입니다.


On credit - 담보 없이 신용으로 일으키는 거래를 말합니다.


Letter of credit - 일반적으로 L/C 라고 하며 수출입 신용장을 말합니다. 수입업자의 신용도를 L/C 발행 금융기관이 보증하여 주는 것입니다.


Domestic credit - 국내 총여신을 말합니다. 국내에 있는 금융기관이 국내의 가계와 기업 등에게 제공한 여신의 총액입니다.


(여기까지는 조금씩 쓰임새가 다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신용' 또는 '여신'이라고 통상적인 번역이 적용되는 경우입니다.)


Tax credit - 우리 말로 세금 공제 (控除)라고 번역합니다. 세금 계산을 할 때에 일정 금액을 마치 세금 납부를 한 것으로 인정하여 감면해 줄 때에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기부금에 따른 세금 공제를 영어로는 tax credit for donations 라고 합니다.


Credit (my account) - 자신의 계좌에 입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수혜다가 국민연금 공단에 자신의 XX 은행 계좌로 자동이체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면, 이를 영어로 'credit my account with XX bank'라고 표현합니다. 번역할 때에는 대기(貸記)라고 합니다. 회계 장부상에 대변(貸邊)에 기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은행에서는 고객의 예금 계좌는 부채 계정이며, 이 계정에 입금이 되어 잔고가 늘어나면 대변에 기장한다 하여 영어로는 credit 이라는 동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들은 실제로는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 나마도 각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가운데에서 제한적인 몇 가지의 의미만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비석'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하여 '비목'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 한명희 작사자 같은 분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애써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들의 여러 가지 의미는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면서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여 한명희 작사자가 지목한 '비목'을 부르지 말아야 할 사람에 포함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