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사람들의 특징 세 가지가 (1)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한다. (2) 예전에 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한다. (3) 앞의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지적을 받으면 노여워한다. 라고 합니다. 저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오늘은 옛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혹여 전에 제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던 분들도 지적은 하지 마시고 그냥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적하시면 제가 노여워할 겁니다.)
제가 금융업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어느 새 만 34년이 넘어 35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뒤돌아 보면 참 그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저는 1978년 외국은행에 첫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Bank of America 서울지점이었습니다. 출근하고 첫 3~4 개월 동안 연수를 받은 뒤 심사부서에 배치를 받고 명함도 받았습니다. 명함 첫 머리에는 한자와 한글을 섞어서 “美國銀行 서울支店’이라고 커다랗게 세로로 써 있고, 그 왼쪽 밑에 심사부서 소속이라는 표시와 함께 제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Bank of America 서울지점은 국내 법인 등기소에 우리 말로 “뱅크 오브 아메리카”라고 등재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美國銀行”은 존재하지 않는 은행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에는 아무도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었습니다.
그 밖에도 지금 생각해 보면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초창기 외국은행 서울 지점에는 대개 두 가지 부류의 직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용산 미 8군 영내의 미군 시설 (Military facility)에서 근무하던 분들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영문과 출신의 대졸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초창기 영문과 출신의 사람들이 심사 보고서 등에 재무제표를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았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유동자산 ⇒ floating asset: 정확한 번역은 current assets 라고 하여야 합니다,.
유가증권 ⇒ valuable instrument: 올바른 번역은 marketable securities입니다.
leverage ratio ⇒ 영향력 비율: 정확한 용어는 부채비율입니다.
account receivable turnover ⇒ 외상매출 뒤집기: 이 용어는 외상매출 회전율이라고 번역하여야 합니다.
unearned discount ⇒ 미수익 할인: 맞는 표현은 선수 이자(先受利子) 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번역한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배우지 않은 것을 시킨 사람들의 잘 못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문과 출신들이 영어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들어 본 적도 없는 회계 용어를 번역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제가 은행에 입행하기 수 년 전부터 회계와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심사 분석 업무에 투입하면서 상당히 체계가 잡혀갔습니다.
제가 입행 초년병 시절 연수를 받으면서 겪었던 또 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용산 미 8군 시설에서 근무하시던 분이 담당과장으로 있던 출납 부서에서 연수를 받을 때였습니다. 본점에서 만들어진 연수 매뉴얼에 NOW account 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있었고, 이 용어가 무슨 말인지 몰라 담당 과장에게 물었습니다. 그 분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NOW 가 뭐예요? 지금이라는 말 아녜요? 그러니까 지금 즉시 돈을 꺼낼 수 있는 account. 즉 checking account. 당좌 예금을 뜻하는 거예요.” 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맞습니다. NOW account은 당좌 예금- checking account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지금- NOW- 즉시 인출할 수 있어서 NOW account 이 아닙니다. 제가 입행 약 2년 후 외환/자금 부서로 옮기고 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NOW는 ‘Negotiable Order of Withdrawal’ 의 머리 글자에서 따온 약자입니다. Negotiable Order of Withdrawal 이란 ‘(금융시장에서) 유통 가능한 예금 인출증’ 을 말하는 것으로, 즉 수표- check 을 의미합니다. NOW- Negotiable Order of Withdrawal- 을 발행할 수 있는 구좌라는 의미에서 당좌구좌, checking account 을 NOW account 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지금- now- 즉시 인출할 수 있어서 NOW account 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쉽게 배울 수 없는 지식도 많이 습득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 표시는 숫자 앞에 사용하고, ¢ 표시는 숫자 뒤에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100 달러는 $ 100 이라고 쓰고, 10 쎈트는 10 ¢ 라고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은행에서는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당시 시중은행에서는 외국은행과는 달리 조금 다른 방식의 인사 원칙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심사부에는 법을 전공한 직원들이 배치 되어 있었습니다. 심사부의 주요 업무가 사전 신용 심사가 아닌 사후 법적 조치에 주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단 부도가 나거나 부실이 발생하게 되면 법적인 수습을 취하는 것이 심사부서의 주업무로 인식되던 시절입니다. 그런가 하면 경영학, 회계학을 전공한 사람은 당연히 회계부서로 발령이 났었습니다. 외국은행에서 회계를 전공한 사람을 심사부서에 배치하는 것을 시중은행에서는 이해를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시중은행의 심사 분석을 정부부처의 금융 지원 정책과 증권시장의 풍문이나 사채시장에서의 평가에 의존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사 배치뿐이 아니라 금융업 전반적으로도 인식이 많이 부족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좋은 예 가운데 하나가 장기신용은행에서 신용카드 사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은 1998년 우리나라의 외환 위기 시절에 국민은행에 합병되어서 사라진 은행입니다. 처음 시작은 한국개발금융공사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고 후에 한국투자금융과 한국개발리스로 분리 되었습니다. 1979년에 장기신용은행법이 생기면서 한국투자금융의 이름을 장기신용은행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장기(長期) 금융을 전문으로 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영어 이름도 Korea Long-Term Credit Bank 였습니다. 장기신용채권이라는 금융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기 정책 금융을 주로 지원하는 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행에서 활발히 진행하던 사업 가운데에는 신용카드 사업이 있었습니다. 신용 카드는 일반 개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1 개월 남짓의 초 단기 신용 상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신용 공급을 주업무로 하여야 할 장기신용은행에서 ‘장은 비자(Visa)’ 라는 신용카드를 발행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신용카드 매출의 3/4 이상을 현금 서비스가 차지 하였습니다. (관련기사: 장기신용카드현금서비스_1989/10/3) 기업에 장기 금융을 제공하여야 할 은행에서 개인에게 신용카드 사업을 통하여 단기 금융(현금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업계 1위를 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농민들을 상대로 금융업을 하는 NH 농협은행이 고액 자산(high net worth) 보유자를 대상으로 하는 프라이빗 뱅킹 (PB, private banking) 업무를 하다가 수익성이 맞지 않아 대부분의 점포를 접기로 하였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관련기사: 농협PB_조선일보 2013/1/11) 농어민을 상대로 금융업을 하기로 한 농협에서 프라이빗 뱅킹을 하려는 것은 좀더 신중하게 검토하였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눈에는 띄지 않지만 아직도 어디에선가는 이런 식으로 본연의 비즈니스 모델과 다른 사업에 시간과 노력, 비용을 쏟아 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상적인 금융 수익 모델과 그에 필요한 시스템 운용과 비용 검토, 적절한 리스크 관리, 인적 자원 관리 등 금융업을 영위하기 위한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준비가 선행된 다음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나간 시절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금융업도 빛나는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융도 앞으로 더 발전하여 세계 금융 시장에서 인정 받는 금융 강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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