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60회 생일- ‘환갑’(還甲)입니다.
제가 스스로 제가 환갑임을 이야기하려니 조금은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환갑이라고 하니 새삼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회상해 보았습니다.
저는 어려서 몸이 약한 편이어서 자주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 중구 초동에 지금의 명보 아트홀 건너편에 지금은 없어진 수도극장(나중에 스카라 극장으로 개명)이 있었고 그 뒤쪽으로 ‘권소아과’라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병원의 단골(?) 손님이었습니다. 아니 단골 ‘환자’였습니다. 이 병원을 자주 찾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제가 다닐 때에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제법 똘똘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6년 동안 빠지지 않고 반장으로 뽑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 인생에서 아주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는 후기 중학교에 다녀야만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경험하였던 큰 충격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군대도 32개월 현역병으로 마쳤습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군복무기간이 34개월이었으나 저는 교련 혜택을 받아서 2개월 감면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군복무 기간에 비하면 무척이나 길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제 첫 직장은 Bank of America 였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이번에는 제게 어떤 고통을 주지는 않았으나 저의 인생 경력을 바꾸게 만드는 커다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80년 1월 12일 우리나라의 금융과 경제에는 엄청난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는 우리나라의 환율은 미화 1 달러당 484원의 고정환율을 적용하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 1월 12일을 기하여 환율이 미화 1 달러당 580원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두 통화의 상대적 가치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환율을 표시할 때에는 ‘기준통화/표시통화’로 표시합니다. (참조: 2012.4.6_금요일 모닝커피_ I wanna hold your hand) 미화 1 달러당 원화 환율 484는 $/₩ 484 라고 표시합니다. 환율이 $/₩ 484에서 $/₩ 580으로 바뀌었을 때에 미국 달러화와 한국 원화의 가치 변화를 계산해 보겠습니다.
가치의 변화를 측정하는 공식 (변한 환율 – 기존 환율) ¸ (기존환율) X 100 을 적용하면;
달러의 가치는 1 달러가 ₩484에서 ₩580으로 뛰었습니다. 따라서 달러의 가치는 (580 – 484) ¸ 484 X 100 = 19.83% 상승하였습니다.
원화의 가치는 기존의 ₩1 = $(1/484) 에서 ₩1 = $(1/580) 으로 변하였습니다. 원화 가치의 변화를 측정하려면 {(1/580) – (1/484)} ¸ (1/484) X 100 = (484 – 580) ¸ 580 X 100 = - 16.55% 입니다. 앞에 마이너스 부호가 있으므로 이는 가치가 하락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달러 가치가 1980년 1월 12일 하루 아침에 19.83% 상승하고 원화 가치는 16.55% 하락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달러/원 환율의 급격한 변화를 예견한 외국계 은행들이 달러 자산을 미리 확보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1980.1.12경향신문_1.12.조치)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당시에는 국내에 24개의 외국은행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 많은 외국은행들이 한국을 떠나고 또 새로이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언급한 C은행과 B 은행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외국계 은행 본점의 입장에서는 미국 달러화로 한국에 투자하여 한국 원화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데, 갑자기 한국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환차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환차손은 원화 가치의 하락 폭인 16.55%가 됩니다. 하루 아침에 이만한 손실을 보게 되었으니 외국은행들은 이를 최소화하려고 달러 자산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반면 국내은행의 입장에서는 달러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 달러 자산을 한국 원화로 환산할 때에 환차익이 발생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의 환차익은 달러 자산의 19.83%가 됩니다.
이런 상황이니 모든 금융기관뿐 아니라 기업들도 달러 자산을 움켜 쥐고 있으려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외환 시장에는 달러를 사려는 사람뿐이고 팔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980년 1월 11일 저녁 국내의 외국은행 지점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외환 시장의 달러 수급의 균형이 깨지면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개입하여 수급을 조절하여 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달러 가치는 오르고 원화 가치가 떨어질 것이 시장에 알려졌고, 외환시장에는 급격한 수요증가와 공급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외국은행들은 한국은행에게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달러를 공급하라는 요구를 하였던 것입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으나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외국은행 외환 담당자들은 한국은행에 모여서 한국은행 보유 달러를 매입하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결국 매입한 달러는 고객과의 거래에 한정하여 사용할 것을 서약하는 각서를 써주고서야 외국은행들은 한국은행으로부터 달러를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각서를 써주고 달러 매입을 완료하였을 때가 이미 밤 12시가 다 되어서였습니다. 한국은행에 있던 외국은행과 한국은행 직원들은 우르르 몰려서 주위에 있는 가까운 여관으로 달려가 하루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은행으로 출근하면서 가판대에 있는 신문에 환율이 달러당 580원으로 뛰었다는 기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당시 제가 다니던 Bank of America 서울지점에서 외환 책임자로 계셨고, 그 날 한국은행에서 각서를 써주신 분은 저의 보스셨던 분이고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을 가 계십니다. 저는 그분에게서 은행 업무에 관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그분과는 이따금 연락을 하면서 지냅니다.
그 날의 소위 ‘1. 12. 조치’는 환율의 급격한 변화뿐 아니라 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을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변동환율제도에 대응하고자 외국은행들은 외환 분야의 인력을 보강하였습니다. 그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제가 다니던 Bank of America 서울지점에서는 제가 선발되었고, 심사분야에서 외환분야로 제 직책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계속 외환, 자금, 자본시장, 투자은행 등에 관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의 ‘1. 12. 조치’는 저의 경력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위에 언급하였던 Bank of America 서울지점에서 외환을 담당하셨던, 제가 모시던 보스 분에 관한 한 가지 일화를 이야기로 오늘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분의 책상 한 귀퉁이에는 조그마한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그 분이 실천하시던 금언이 있었습니다.
“공경(恭敬)은 위로, 책임(責任)은 내가, 공(功)은 밑으로”
저도 한 동안 이 금언을 제 책상 구석에 적어 놓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이하면서 한 번 뒤돌아 봅니다. 이 금언을 실천하도록 다시 한번 노력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도 한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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