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종편 채널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가운데 매우 높은 인기를 누렸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제목은 “응답하라 1994”입니다.
저는 이 프로를 열심히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건성건성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한 두 번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보면서 사람들이 지나간 일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이 드라마의 인기에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저만의 추측이 아닙니다. ‘감성적인 90년대 음악과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시청자의 향수가 인기몰이의 한 축이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관련기사: 머니투데이_2013.11.20.응답하라1994_인기비결)
지나간 과거를 돌아 본다고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 때의 일들을 후회한다고 시계 바늘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지나간 시절의 아쉬운 시간들을 되새겨 봅니다.
제가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시간은 1989년입니다. 지금부터 25년 전입니다. 제 입장에서 돌아봅니다;
1989년은 기사(己巳)년 뱀띠 해였습니다. (저도 뱀띠입니다.) 이 해 9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이 통일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기록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 해에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천안문 사태입니다. 1989년 이른 초여름 저는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점심 시간 때 즈음에 호텔에 체크 인을 하였고 별 생각 없이 TV를 틀었습니다. 이 때 CNN 뉴스에서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군인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반복하여 보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난 바로 다음해여서 경제적인 호황기를 맞기 시작하였던 해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1989년에 제가 소속되어 있던 파리바 은행 서울지점에 기록적인 수익을 올려준 한 해였습니다. 급변하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새로운 개념의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을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에게 소개하면서 거래 금액과 이익 규모에서 국내 외국은행 가운데 1~2위를 다툴 정도로 성공적인 성적을 보였던 한 해였습니다.
그 때의 금융 환경을 한 번 되돌아 보겠습니다.
1989년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금융 관련 규정들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외화대출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규제하였습니다. 금융당국에서는 외화대출의 규제에 대하여 외화 유입에 의한 통화 가치 하락을 예방한다는 원론적인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당시의 원화 이자율은 시장 실세금리가 연(年) 15%를 상회하였으며 미국 달러화의 이자율은 프라임 레이트(Prime Rate, *주: 미국의 최우대 대출금리)가 10% 수준이고, 런던 은행간 금리(LIBOR; London Inter-Bank Offered Rate)는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달러화로 자금을 빌리면 이자율에서 원화로 빌리는 것보다 상당히 유리하였습니다. 그리고 환율도 1987년 말 1 달러당 800원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1988년 11월 초에는 700원 밑으로 떨어지면서 달러의 약세가 지속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실제로 1989년 말의 달러당 원화 환율은 678원 70전에 마감하였습니다.)
미국 달러화의 이자가 낮고 미국 달러화가 한국 원화에 비하여 약세가 될 것이 기대되므로 기업들은 당연히 미국 달러화로 부채를 일으키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금융 감독기관에서는 더욱이 외화 대출에 대한 감시와 관리를 강화하였습니다.
1989년 즈음에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이고 각종통신과 언론매체도 지금처럼 발달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금융상품에 대한 보급이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늦었습니다. 그리고 국내 금융기관에서는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접근이 한 발짝 늦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은행 국내지점들은 그에 반하여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새로운 개념과 상품 개발에 대한 접근이 쉽고 빨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상품을 이용하는 방법론에서도 한 발 앞서 갔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 달러화와 한국 원화간의 외환 옵션 거래에 필요한 요소는 (1) 옵션 기간, 그리고 (2) 미국 달러화와 한국 원화의 현물환율, (3) 미국 달러화 이자율, (4) 한국 원화 이자율, (5) 환율의 변동성(volatility)입니다. 이들 다섯 가지 요소만 있으면 옵션 가격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환율의 변동성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는 모두 시장에서 쉽사리 구할 수 있는 가격- 환율, 이자율 등-이고 거래 기간은 거래 당사자가 원하는 기간을 택하게 됩니다. 시장에서 옵션 거래를 하면 거래된 가격에 따라 환율의 변동성을 역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계산된 환율의 변동성은 다른 거래의 가격 계산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달러 대 원화 옵션 거래를 하면 미국 달러 이자율과 한국 원화 이자율이 모두 적용되는 거래를 하게 됩니다. 옵션 거래를 잘만 이용하면 이자율이 낮은 미국 달러화로 자금을 빌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달러 약세에 따른 환차익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래를 소위 금융공학 (financial engineering)이라고 부릅니다.
1989년에는 저와 함께 일하던 팀에는 금융공학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있어서 2~3년 전부터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금융공학을 이용한 금융상품 거래로 우리나라 기업에게는 낮은 이자율의 자금을 제공하면서 환차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자, 환율에서 모두 이익을 볼 수 있으니 저희와 거래를 마다할 리가 없었고, 그에 따라 저희는 엄청난 금액의 거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신용한도가 허용하는 최대한의 금액을 거래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금액의 거래와 커다란 이익을 남겼습니다.
제가 일하던 서울 지점은 파리바 은행 본점에서 인정해 줄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올렸습니다. 그 즈음 제가 파리에 출장을 가면 파리바 은행의 (이사회) 회장 (Chairman)과 사장 (President)이 각각 시간을 내어 저와 함께 식사를 하곤 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서울 지점의 실적에 대만족이라는 치하를 아끼지 않곤 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특히 제게 두둑한 연말 보너스가 주어지기도 하였습니다.
1989년 11월 말에는 파리바 서울 지점의 지점장, 부지점장과 함께 부장급 간부 10여 명이 부부 동반으로 홍콩으로 단체 여행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목요일 저녁에 서울을 출발하여 금요일 하루 종일 간부들은 연례 회의를 하였고, 부인들은 각자 쇼핑과 관광을 즐겼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는 아시아 지역 본부가 주최하는 홍콩 지점 간부 + 서울 지점 간부의 만찬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지점장은 서울 지점의 실적에 한껏 고무되어 여러 번의 건배를 제의하고 저녁 식대를 서울 지점이 부담하겠다고 호언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토요일 오전에는 서울 지점 간부 회의, 오후에는 관광과 쇼핑 등으로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일요일에 서울로 돌아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여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여러 가지 즐거운 추억들이 가득한 한 해였습니다. 즐거웠던 모든 추억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고 싶은 시간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때를 되새겨 봅니다.
“응답하라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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