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4~2016

KNA- 2014. 2. 21.

jaykim1953 2014. 2. 21. 09:32

 

지난 월요일 아침 조간 신문에는 미국 서부의 관문도시인 로스앤젤레스에 대한항공이 랜드 마크 호텔을 2017년 완공예정으로 건설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관련기사: 한경_2014/2/17_LA 랜드마크호텔) 이 기사를 보면서 격세지감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우리나라 기업이 전세계 곳곳에서 왕성한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하여 별로 낯설지 않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또래의 나이 든 세대의 사람들은 예전과 비교하면 하면 요즘 우리나라의 눈 부신 발전은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 정도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를 누비는 대한항공을 바라 보면서도 그런 감회가 없지 않습니다.

지금의 대한항공은 처음에는 국영 기업이었고, 1960년대 말 한진 그룹에 인수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항공이 우리나라 항공업의 효시는 아니었습니다. 대한국민항공사- 영문으로 KNA (Korean National Airlines)가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사업을 영위하던 회사입니다.

저는 KNA 비행기를 타보았습니다. 1961년 이른 봄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으로 진급하기 직전 봄 방학 기간 동안 학교에 가지 않는 때였습니다. 저는 저희 선친을 따라 부산으로 비행기를 타고 내려 갔습니다. 승객이 아주 많지는 않았던 그리 크지 않은 비행기로 기억합니다. 여승무원이 보리차도 주고 사탕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엔진 소음과 기압차로 인하여 귀가 멍해지자 코를 막고 공기를 내뿜어 고막을 밀어내는 동작을 취하는 요령도 배웠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갈 때에는 쌍발기(雙發機, *: 프로펠러가 양쪽 날개에 각 하나씩, 모두 두 개의 엔진으로 작동되는 비행기)였으나 서울로 돌아 오는 길에는 사발기(四發機, *: 프로펠러가 각 날개에 두 개씩 모두 4개의 엔진으로 작동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올라 오는 길에는 더 큰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서울의 여의도 공항과 부산의 수영 비행장 구간을 운항하였습니다.

여의도 비행장은 지금은 국회의사당, 오피스 빌딩, 아파트 등이 가득한 여의도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는 공항이라는 단어보다 비행장이라는 단어를 더 즐겨 썼습니다.) 1971년 이 곳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공항을 폐쇄하였습니다. 여의도 비행장은 KNA의 베이스 공항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사인 KNA는 해방과 더불어 비행기 파일롯이었던 신용욱 사장이 설립하였습니다. 신용욱 사장은 일제시대부터 비행기 조종을 하였던 사람으로 한 때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관련기사: 1949_친일비행사 신용욱 기소유예) 그러나 상황의 불가피성 등이 참작되어 기소유예로 풀려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KNA는 취약한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국적기로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미국의 시애틀까지 국제선 취항도 하였습니다. (관련기사: 1957/5_경향신문_KNA미국취항)

그러나 낡은 비행기와 빈약한 항공 여객 기반, 각종 사고, 보유 항공기의 납북 (관련기사: 1958/2/18_경향신문_KNA월북) 등의 악재가 겹쳐 1962년 항공사업 면허가 취소되기에 이릅니다. (관련기사: 1962.11. 날개 꺾인 KNA) KNA가 문을 닫기 전 해인 1961년 여름에 이 회사의 신용욱 사장은 여의도 인근에서 한강에 투신 자살을 합니다. (관련기사: 1961.8.29_KNA신용욱사장 자살) 경영난에 빠진 회사를 구하려는 노력이 점점 어려워지자 마지막 순간에 극단적인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KNA의 주력 항공기는 3 대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이하게 이들 항공기에 이름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창랑호(滄浪號), 만송호 (晩松號), 우남호(雩南號)였습니다. 창랑은 미군정하에서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하였으며,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6.25 전쟁 때의 주 유엔 한국 대표,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장택상(張澤相)의 아호(雅號)입니다. 만송은 이승만 대통령의 2인자로 군림하며 국방부 장관,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이기붕(李起鵬)의 아호입니다. 이기붕은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 시비를 일으켜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였고 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정치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남은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아호입니다.

3 대의 비행기 가운데 만송호는 1957년 착륙사고로 인하여 비행기를 잃었고, 창랑호는 북한으로 납북되었습니다. 결국 주요 비행기 3 대 가운데 2 대를 잃게 되어 항공기 운항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납북된 창랑호는 그 당시 비행기 보험 약관상 사고의 정의에 납치가 포함되는지 여부를 놓고 국제적인 송사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재정적인 뒷받침이 약한 KNA로서는 재판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창랑호의 보험금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KNA의 경영 상황을 보면서 투자의 리스크 관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KNA는 단 3 대의 주력 비행기로 모든 국내선과 국제선을 운행하였습니다. 당시 국내선은 부산, 광주, 대구, 강릉 등을 운행하였으며, 국제선은 홍콩, 대만, 미국의 시애틀 등으로 부정기 운항을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투자를 하면서 단 3 종목에 집중 투자를 한 것과 유사합니다. 3 대의 비행기 가운데 한 대는 착륙 사고로 잃고, 또 한 대는 납북되었습니다. 이는 3 종목에 집중 투자하였다가 2 종목에서 예상이 빗나가 손실이 크게 발생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지난 해 어느 기관 투자자의 푸념이 떠오릅니다. 그는 약 60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국내의 어느 투자자문사와 일임계약을 통하여 운용하였다고 합니다. 불과 7~8 개월의 기간 동안 투자 금액의 1/3에 달하는 금액의 손실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뒤늦게 투자 포트폴리오를 들여다 보니 단 4 종목에 60억 원을 모두 투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하는 투자 격언 가운데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투자금을 한 종목(바구니)에 몰아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는 유리창에는 창살이 많아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리창에 창살이 많으면 혹시 실수로 돌멩이가 날아 들어 온다고 하더라도 창살로 나뉘어진 유리 한 쪽만 깨어집니다. 그러나 만약 창살이 없는 유리- 통유리에 돌멩이가 날아 온다면 그 유리는 모두 깨어져 박살이 나고 맙니다. 투자 종목의 다변화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투자 종목의 분산도 매우 중요한 리스크 관리의 방법입니다. 너무 소수의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것은 종목의 선택에 실수가 발생하면 손실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이를 방지하려면 종목을 적정 수준의 종목수로 분산 투자하여야 합니다.

요즈음 일부 기관 투자가를 위한 펀드 가운데에서는 작은 숫자의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집중 포트폴리오 (concentrated portfolio)를 운용하는 펀드도 있습니다. 기관 투자가는 성격상 여러 종목의 펀드에 투자하게 되는데 이 때에 각기 다른 펀드가 투자한 종목이 겹쳐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부 종목에 집중 투자를 하는 펀드를 여러 개 매입하기도 합니다. 집중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펀드라 하더라도 최소한 10개 종목 이상에 투자하며, 일반적으로 15~20 종목에 투자하게 됩니다. 리스크 관리 목적으로 종목수를 10개 이상으로 늘리는 것입니다.

초기 우리나라 항공업계는 리스크 관리의 개념마저도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 영세하였고, 기반이 취약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항공업계뿐 아니라 거의 전 산업분야가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혹은 앞서 가기도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리스크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작은 금액의 수익이 모이고 모여 큰 이익을 냅니다. 그러나 한 번의 리스크 관리 실패가 큰 금액의 손실로 이어지고, 때에 따라서는 회사의 존립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KNA는 이미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리스크 관리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제는 금융계뿐 아니라 전 산업계에서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