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이름을 날리던 권투 선수 가운데 서강일(徐强一) 선수가 있습니다.
서강일 선수는 6.25 전쟁 고아로 알려졌으며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복서로 매우 높은 인기를 누렸던 권투 선수입니다. 우리나라 권투 선수 가운데 세계 타이틀에 가장 먼저 도전하였던 선수가 바로 서강일 선수입니다. 1966년 김기수 선수가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에 도전하여 챔피언이 된 것은 서강일 선수의 도전보다 1 년이 늦었습니다.
1965년이었습니다. 비율빈 (比律賓, *주: 필리핀을 당시에는 비율빈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의 케손 시티에서 벌어진 서강일 선수의 주니어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매치를 TV에서 중계하였습니다. 이 당시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중학교 입시를 사흘 앞 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전국적으로 12월 7일에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서강일 선수의 타이틀 매치는 12월 4일에 벌어졌습니다. 불행히도 입시를 코 앞에 둔 탓에 저는 전 경기를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잠깐 잠깐 TV 중계를 훔쳐 보며 경기 상황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날의 TV 중계는 지금 보면 거의 코메디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TV에서 나오는 소리는 멀리 필리핀에서 오는 소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이따금 파도 소리 같은 잡음과 함께 약간의 에코 효과를 동반한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화면은 과거 서강일 선수가 경기하던 장면의 스틸 사진 몇 장이 번갈아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 방송의 기술 수준으로 현지 중계가 불가능하였던 것인지 혹은 경비 문제로 화면 송출을 못하였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제가 본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타이틀 매치 권투 중계는 ‘우리의 서강일 선수 좌우 훅을 날리며 선전하고 있습니다.’라는 아나운서의 톤 높은 들뜬 목소리와 현재의 경기와는 관계 없는 선수 사진이 화면에 비쳐지는 그러한 중계였습니다.
그 날 경기 결과는 서강일 선수의 아쉬운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관련기사: 1965. 12. 6. 경향신문- 서강일) 판정 결과가 판정패로 나오자 그 당시 중계를 하던 아나운서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깝습니다 우리의 서강일 선수 정말 잘 싸웠습니다만 홈 링의 텃세로 인하여…’ 라며 시청자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그 날의 경기를 보지는 못하였지만 아나운서의 중계만 들었던 많은 시청자- 아니 청취자들은 서강일 선수가 일방적으로 리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나운서의 중계는 쉴 새 없이 ‘우리의 서강일 선수’가 레프트 스트레이트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상대 선수의 안면을 강타하고 강력한 라이트 훅을 작렬시켰다고 일방적으로 서강일 선수가 공격하는 상황만 중계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날의 주심과 2 명의 부심이 모두 필리핀 사람들이었으니 부분적으로 편파적인 판정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의 아나운서 중계처럼 서강일 선수가 일방적으로 경기를 리드하였던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판정이 편파적이었다면 아마도 중계는 더더욱 편파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강일 선수는 세계 타이틀 매치 불과 1년 전에 필리핀에서 동양 타이틀 매치를 가졌었고 이 때에는 정말로 편파 판정에 의한 판정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관련기사: 1964.11. 동아일보- 서강일) 이 때에는 서강일 선수의 매니저였던 김준호 트레이너가 말도 안 되는 판정이라며 링 위에서 펄펄 뛰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도 유명하였습니다. 1년 전의 이런 기억 때문에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서강일 선수가 편파 판정 때문에 세계 타이틀을 놓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서강일 선수는 그 당시 필리핀에 상당 기간 머무르면서 그 곳에서 여러 번 경기를 하였고, 현지에서 인기도 상당하였다고 합니다. 척박한 우리나라 권투 시장을 벗어나 당시로서는 좀 더 큰 시장인 필리핀에서 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선구자적인 해외 진출이었습니다. 그 후 또 한번의 세계 정상에 도전하였으나 그 경기에서 패한 이후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걸었습니다. (관련기사: 1967 매경- 서강일) 서강일 선수는 한 때 폭행 사건 등에 연루되기도 하면서 잊혀져 갔고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금융계에도 열악한 우리나라의 금융계를 거치지 않고 해외로 나가 외국의 금융시장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태여 서강일 선수에 비유하자면 ‘금융계의 서강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보다도 외국의 금융 시장에서 더 성공한 분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주인공 본인의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 분의 실명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 분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1년쯤 다니다가 3년간의 군대 복무를 마치고 197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에서 포스트 그래듀에이트 (post graduate, *주: 우리나라의 재수와 유사한 제도로 졸업생이 학교에 다시 다니며 상급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과정) 프로그램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에 이 분 나이가 만 23~4세 정도였으니 자기보다 4~5세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던 것입니다. 선생님들조차 이 분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Mr. Xxx”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실제로 선생님들 가운데는 이 분과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늦깎이 재수생은 다행히 뉴욕의 명문 대학 진학에 성공하였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미국 유수의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금융에 관한 경력을 쌓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케팅 분야에서 시작하였으나 곧 시장, 종목 분석에 흥미를 느끼고 스스로 이에 관련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0년의 증권회사 경력을 뒤로 하고 독립하여 헤지 펀드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 분의 시장 분석 능력과 종목 선택에 대하여 신뢰를 보인 투자자가 이 분의 헤지 펀드에 종자 돈을 마련해 주어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헤지 펀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이 주로 투자 대상으로 하였던 시장은 미국의 주식 시장과 중남미 국가의 자본 시장과 해외 투자에 따른 환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외환 시장이었습니다. 이 분이 운용하는 헤지 펀드는 한 동안 미국의 유수 평가 기관에서 해당 년도 최고의 펀드로 여러 번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분이 시장에 잘 알려지자 우리나라의 기관투자자들이 이 분을 찾아 오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분도 한국 사람들의 미팅 약속을 잘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한국에서 온 기관투자자들과의 미팅을 회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방문하는 기관마다 매번 똑 같은 질문, 판에 박힌 요청, 한국의 기관투자자와 거래하면 이 분의 헤지 펀드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는 뉘앙스의 코멘트에 이 분도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분은 지금 헤지 펀드 운용에 전념하면서 한국계 금융기관과의 접촉을 끊고 계십니다. 헤지 펀드의 실적도 좋을 뿐 아니라 이 분이 살고 있는 저택, 타고 있는 차량 등을 보면 한 눈에 이 분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성직자도 아니고 자원봉사자도 아닙니다. 자본을 투자하여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실적을 평가 받고 헤지 펀드 운용을 잘하여서 자신의 부(富)를 키웠습니다. 부를 축적하는 데에 조금도 부끄러움도 없었고 잘 못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부를 축적한 성공한 금융계 인사는 존경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금융계에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고 그에 뒤따라 많은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금융계의 훌륭한 인재로 존경 받는 풍토가 만들어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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