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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카를로스- 2015. 5. 22.

jaykim1953 2015. 5. 22. 09:34

에르네스토 카를로스 (Ernesto Carlos) 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이름을 모른다고 답하실 분들이 99.99%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원국’ (李原國)이라는 이름은 들어 보셨습니까?

야구를 좋아하시는 , 또는 60 중반 이상 되시는 분들 가운데에서는 이원국이라는 야구선수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원국 선수는 서울의 중앙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1966 일본의 프로야구에 스카우트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968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커브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의 팀에서 2 선수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2년쯤 멕시코 리그로 옮겨 갔습니다. 멕시코 리그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인정 받고 정착하여 멕시코 국적까지 획득하였습니다. 멕시코 국적을 획득하며 갖게 그의 이름이 에르네스토 카를로스라는 스페인어식 이름입니다.

그는 국내 야구인들 사이에서는 야구를 사랑하는 국제적인 방랑객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해외에 나가는 것이 하늘의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에는 후배 선수들의 부러움을 몸에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982 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가 생겨 나면서 이듬해에 우리나라의 MBC 청룡팀의 투수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의 프로야구에서는 이원국이라는 이름을 검색하여도 별로 인상적인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1983 동안 이원국 선수는 모두 8 게임에 등판하여 1 1, 평균 자책점 4.42 지극히 평범한 성적을 기록하고는 시즌 중반 멕시코로 돌아갔습니다. (관련기록: 투수_이원국_1983기록)

이원국 선수의 진가는 그가 중앙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습니다. (관련기사: 1965/10/21_경향신문_4게임서탈삼진58이원국) 황금사자기 대회 결승전 한 게임에서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였습니다. 투수가 한 경기에서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한 것은 1982년에 시작한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2010년이 되어서야 나왔습니다. 현재 미국 LA다저스에서 뛰고 있는 류현진선수가 기록한 것이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기록입니다. (관련기사: donga.com_2010/5/12_류현진17탈삼진) 물론 이러한 기록은 상대적이기는 합니다. 프로야구선수를 상대로 한 기록과 고등학교 선수- 그 것도 50년 전 고등학교 야구 수준- 과는 차이가 많이 날 것입니다.이원국 선수는 1965년 동아일보 주최 황금사자기 전국 고등학교 야구대회에서 두 번이나 노히트 노런 경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관련기사: 동아일보_1965/10/21_최우수선수이원국) 이 당시 이원국 선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상대 선수들은 고등학교 3학년 선수들이었습니다. 1년의 나이 차이가 별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고등학생 수준에서는 1년의 차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이원국 선수와 나이는 같으면서 학년이 아래인 선수가 이미 고인이 된 경북고등학교의 임신근 선수입니다. 임신근 선수는 1949년생이면서 1966년 경북고 1학년으로 전국 대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당시 운동선수들에게 많이 있었던 ‘1년 이상을 꿇은선수였습니다. 임신근 선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타자로 변신하여 훌륭한 타자로도 기억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에는 초고교급투수로 불리며 전국대회를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탈삼진, 노히트 노런 경기 등의 기록으로 간접 비교해 보면 이원국 선수가 투수로서는 조금 더 앞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이원국 선수가 이렇게 걸출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1983년 고국에 돌아와서는 이렇다 할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조금 더 나은 경기력을 보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제게는 그렇습니다. 제가 중앙중학교 3학년 때인 1968년 봄 어느 월요일의 애국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이원국 선수에게 중앙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원국 선수는 미국으로 건너가는 준비를 위하여 귀국해 있었고, 그의 동기생들은 이미 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하였던 때입니다. 그러자 중앙고등학교에서는 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그에게 명예졸업장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그 때에 줄 맞춰 도열해 있으면서 박수를 쳤던 학생이었습니다.1960년대의 이원국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1983년의 기록은 전성기가 지난 이원국 선수의 슬픈 뒷모습이었습니다. 1949년생이니 1983년의 이원국 선수의 나이는 만 34세였습니다. 지금과 같이 선수관리가 잘 되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았더라면 34세의 나이에도 선발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중간 계투라던가 마무리 투수로는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당시에 이미 선발 투수로만 10년 이상 시즌을 뛰었던 선수입니다. 미국의 프로야구와는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멕시코 리그에서 뛰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때에는 이미 한 물 간선수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지금의 야구선수들은 철저한 몸 관리와 훈련으로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예전의 운동선수들은 30세 전후에 모두 은퇴하였습니다. 대부분 아마추어 선수 자격으로 소속 기관에서 실무를 배우고 현업에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운동을 오래 하는 것이 경력 관리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운동을 오래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체력관리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우리나라 프로야구 기록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대기록 가운데 하나가 1982년 개막전에서의 역전 만루 홈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프로야구 경기였고, 이 경기가 10회 연장으로 이어졌습니다. 10회 말에 만루 상황에서 MBC 청룡의 이종도 선수 (*: 이종도 선수도 이원국 선수와 같은 중앙고등학교 출신입니다.)가 만루 홈런을 치며 경기를 끝냈습니다. 이 때 만루 홈런을 허용한 투수가 이선희 선수입니다. 이선희 선수는 경북고등학교 시절 황규봉 선수와 쌍두 마차로 경북고등학교의 마운드를 지키며 전국 대회를 제패하였던 선수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황규봉 선수가 조금 더 낫다는 평가를 받고 고려대학교에 스카우트 되었습니다. 이선희 선수는 실업팀인 농협으로 갔습니다. 황규봉 선수는 대학 1학년 때에 최연소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필리핀의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합에는 출전도 해 보지 못하고 묵고 있던 호텔에 화재가 나서 대피하는 과정에서 3층에서 뛰어 내리다가 부상을 당하여 그 이후 급격히 경기력이 떨어졌습니다. (관련기사: 황규봉 트라우마) 그 반면 황규봉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이선희 선수는 고등학교 졸업후 실업팀에서 농협의 에이스로 군림하며 주가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1982년 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가 생기자 그의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러브콜을 받고 삼성 라이온즈의 좌완 에이스로 발탁되었습니다. 첫 프로의 무대인 개막전에서 끝내기 역전 만루 홈런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코리안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또 다시 OB 베어스 (현재의 두산 베어스 전신) 소속 동갑내기 김유동 선수에게 만루 홈런을 맞고 눈물을 떨구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이선희 선수는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1987년에 선수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만 34세 되던 해였습니다. 이원국 선수가 MBC 청룡으로 돌아오던 해의 나이입니다.요즈음의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은 30대 후반 또는 40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약합니다. (관련기사: 노장이병규홈런) 그만큼 체력과 몸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운동선수에게 몸 관리, 체력관리는 아무리 중요함을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사실은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체력관리가 중요합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저도 느끼는 점입니다.

문득 저와 주변의 예전 동료들을 둘러 봅니다. 저뿐 아니라 그들도 때에는 나가는 금융맨들이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 초반까지는 저와 저의 동료들에게는 황금기였습니다. 2 달러 남짓한 엑스포저를 가지고 연간 2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2천만 달러의 수익이란 이자 비용을 모두 빼고 금액이었습니다. 그야 말로 엄청난 금액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매년 새로운 아이디어와 금융 기법으로 고객들에게도 많은 이익이 돌아갈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소속되어 있던 은행에 상당한 수익을 올려 주었습니다. 일이 재미 있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의 특성상 전세계의 외환시장이 24시간 열려 있다 보니 걸핏하면 밤을 새우곤 하였습니다. 매일 저녁 당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사람씩 사무실을 지키며 전세계 외환 시장을 지켜 보기도 하였습니다. 때에는 몰랐습니다. 언제까지 그런 체력이 뒷받침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각종 성인병과 체력의 한계에 힘들어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도 이제는 조금만 과로하여도 힘이 들고 여러 가지 부작용(?) 나타납니다.

운동선수에게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건강이 중요합니다. 문득 돌아가신 저의 어머님 말씀이 생각 납니다. 하시던 말씀;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이다.”

건강하십시오. 다음 주에 다시 건강하게 찾아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