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77년 가을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군에서 제대하고 학교로 복학을 하였을 때입니다. 어느 날인가 제가 다니던 상경대학 로비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제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장발이 유행하였으나 그는 머리를 짧게 깎았고, 체격은 탄탄해 보이고 듬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별로 유행하지 않던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 말하였습니다. “77학번 1 학년 최동원입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최동원 선수와 알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게 와서 인사를 한 이유는 제가 박해종이라는 야구선수와 친구로 지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박해종 선수는 원래 저보다 1년 위입니다. 동대문 상고를 졸업하고 기업은행(중소기업은행)으로 스카우트 되어 실업야구 선수로 있었습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여 대표팀 주전 포수로도 활약하였습니다. 약 3년간 실업선수로 활약하면서 실업리그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실업리그는 춘계, 추계를 통틀어 팀당 연간 20 게임 정도 소화하던 시절입니다. 총 19 게임에서 12 개의 홈런을 쳐냈으니,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요즈음처럼 한 팀이 연간 140 게임 이상을 소화한다면 80 개가 넘는 홈런을 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육군에 입대하여 당시 육군 야구 팀이던 경리단 (육군중앙경리단)에 소속되어 선수생활을 계속하다가 제대와 함께 제가 다니던 학교에 야구 종목의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나이 26살에 늦깎이 신입생 1학년이 된 것입니다. 박해종 선수의 포지션은 포수이고 최동원 선수는 투수이다 보니 그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을 잘 맞춰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두 사람 모두 상경대학 경영학과여서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박해종선수가 학교에서 걸핏하면 만나서 반갑게 이야기하는 사람 가운데 최동원 선수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바로 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박해종 선수와 서로 말을 놓는 사이인 것을 보니 자기 보다는 분명 선배인 듯하여 최동원 선수가 제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신입생이 되어 1학년으로 입학한 박해종 선수는 한 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공부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런 저런 공부하는 요령과 조언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별 허물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제게 찾아 와서 도움을 요청했고,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물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묻기도 하였습니다. 시험을 앞두고는 각 교수님의 과거 출제 경향 따위를 제게 묻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그의 옆에 최동원 선수가 귀동냥으로 제가 전해주는 정보를 함께 공유하였습니다.
그 해 늦은 가을 어느 일요일에는 서울에 있는 4개 대학 경영학과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마침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서울대학교 경영학과가 나머지 학교들을 초청하여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서 축구, 소프트 볼, 줄다리기 등의 운동 경기를 하였습니다. 모든 경기에 프로(?) 선수는 해당 종목에 출전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끼리 프로 선수라고 불렀던 선수는 축구협회, 야구협회 등에 등록된 선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최동원 선수와 박해종 선수가 바로 그러한 프로 선수의 부류에 속하였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우리 소프트 볼 팀의 감독, 투수 코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팀 선수들의 실력은 감독과 코치의 실력에 많이 못 미쳐서 초반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코치한다 하여도 순수 아마추어 팀이었던 저희 학교 팀의 실력은 변변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도 최동원 선수와 박해종 선수가 재학중일 때에는 전국의 모든 대학이 저희 학교 야구 팀과의 경기에서 한 번 이겨 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만큼 출중한 선수였고 그들이 소속된 팀은 난공불락이었습니다.
1978년에 복학생 4학년이었던 저는 학점관리를 목적으로 저학년 수업도 일부 수강신청을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2학년 수업이었던 ‘조직행동론’도 있었습니다. 그 수업에는 최동원 선수와 박해종 선수가 모두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 두 선수는 노트 필기와 시험 공부를 제게 많이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시험 준비한답시고 준비한 요점 정리를 그들에게 빌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그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최동원 선수가 제게 물어 봤습니다;
“헹님 요새 은행에 1억 원을 맡기면 월 백만 원은 받지 싶은데예?"
그 당시의 화폐가치로는 월 백만 원은 상당히 큰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1억 원은 정말로 큰 돈이었습니다. 그 당시 공금리는 연 10~12% 수준이었으니 그의 말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왜? 누가 1억 원을 주겠다고 하니?”
“아임니더, 제 생각에는 은퇴하기 전에 그 정도 돈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더. 우리는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운동만 했으니 뭔가 생활방편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꺼? 운동을 은제까지 할 지도 모르는 거 아입니꺼. 뭔가 대책을 세워야 않겠나 싶습니더.”
그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0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이에 경상도 말로 그는 이미 ‘시근이 꽉 찬’ 젊은이였습니다. 운동을 그만 두더라도 생계를 마련할 궁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예상대로 그는 운동을 오래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이 30 즈음에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5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그들과 자주 교류하지 못하여 소식을 주고 받지 못하여 알 수는 없습니다만, 최동원 선수는 나름대로 노후 대책을 마련해 놓았으리라 추측합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최동원 선수가 은퇴 후 불고기 집, 혹은 장어 구이집을 운영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노후 대책으로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이 조금도 잘 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후 대책이 마련되어 있다면 구태여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인 음식점을 개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역으로 추리해 보면 최동원 선수는 무언가 노후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말년 50세가 될 때까지 투수 코치 등을 하면서 야구장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야구인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투수로 최동원 선수를 꼽습니다. 그는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나, 그의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의 평가로 보나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입니다. 특히나 아무리 어려운 핀치에 몰려서도 조그마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강속구를 펑펑 내리 꽂는 모습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에서 첫 손가락 꼽히는 그런 최동원 선수는 이미 20세에 그의 노후 대책을 걱정하였습니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운동을 그만 두고 생계가 막막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전직 운동선수들이 생계를 위하여, 또는 도박에 빠져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범죄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관련기사: yonhapnews.co.kr_2017/2/26_전직아구선수 마약) 그에 비하면 최동원 선수는 도박에도 빠지지 않고, 불건전한 사업에 손대지 않은 건실한 야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일찍이 운동선수로서의 생명이 길지 않음을 알고 노후대책을 20세의 나이에 걱정하였습니다. 요즈음의 운동선수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최근 최동원 선수의 어머니가 최동원 선수의 동상을 찾은 것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관련기사: joins.com_2017/4/7_최동원 어머니) 최동원 선수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6년이 되어 갑니다. 오늘은 제가 그와 얽혔던 짧고 작은 인연을 되새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