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야구선수 구본혁- 2019. 6. 28.

jaykim1953 2019. 6. 28. 18:00



열흘쯤 전 국내 프로야구 경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LG트윈스의 루키 (rookie) 구본혁 선수가 역전 투런 홈런으로 승리 타점을 올려 그 날 경기의 최고 수훈 선수가 되었습니다. (관련기사: 신인 구본혁 역전 투런 포_2019/6/19)

구본혁 선수는 금년에 입단한 신인선수이니 잘 알려졌을 리가 만무합니다. 저도 열심히 검색해 보니 금년도에 대학을 졸업한 선수였습니다. 야구 선수들은 대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프로 구단에서 지명을 받고 바로 프로 선수로 데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 프로구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선수들은 대학으로 진학하여 4년간 실력을 갈고 닦아서 대학 졸업과 함께 다시 한 번 프로 구단의 입단을 노려 봅니다. 구본혁 선수도 장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구단에서 지명을 받지 못하였고 동국대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내야수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대학 졸업과 함께 LG트윈스 구단의 지명을 받고 입단한 만 22세 프로 초년생입니다.

저는 마침 이날의 경기를 보았습니다. 경기를 중계하는 해설자와 아나운서는 구본혁 선수는 LG 트윈스의 주전 3루수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대체 요원으로 2군에서 콜 업된 선수라고 하면서, 지난 14 번의 타석에서 한 번도 안타를 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5번째 타석에서 역전 투런 홈런을 친 것입니다. 1군 프로 선수로서 생애 첫 안타를 홈런, 그 것도 경기를 뒤집는 역전 투런 홈런을 친 것입니다. 홈런을 친 다음 경기장 베이스를 모두 돌고 홈으로 돌아와서 덕 아웃으로 들어가자 모든 선수들이 막내 신인 선수의 홈런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관련 동영상 구본혁 첫 안타 투런 홈런  ) 몇 해 전까지 선수로 뛰던 코치는 그를 꼭 안고 기뻐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0년이 훌쩍 넘습니다. (이병규 코치는 1974 10월 생이고 구본혁 선수는 1997 1월 생입니다.)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구본혁 선수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 업 된 것을 보면 아직 솜털이 얼굴에 보송보송한 앳된 모습입니다.

6 18일의 경기에서 그가 친 홈런이 화제가 되었다면 그 다음날 경기에서는 구본혁 선수의 수비가 돋보였습니다. (관련 동영상:  코너를 든든히 지켜주는 구본혁) 구본혁 선수가 몸을 아끼지 않는 멋진 수비를 보이자 수비 코치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면서 머리 숙여 인사까지 합니다. 금년에 새로 들어온 신입 선수에게는 거의 최고의 극진한 칭찬일 것입니다.

만약 구본혁 선수의 스토리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든다면 여기까지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의 지명을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합니다. 절치부심 열심히 야구에 매진하여 대학 졸업과 함께 프로 팀에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프로의 벽은 높기만 하여 쉽사리 출전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2군에서 열심히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3루수의 부상으로 1군에 콜 업되었습니다. 구본혁 선수의 원래 수비 포지션은 유격수였으나 다행히 대학 시절부터 여러 내야 수비를 맡아 본 경험 덕분에 3루수 자리에 수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의 높은 수준에 적응이 미쳐 되지 못하여 공격에서는 14번 타석에 섰으나 단 하나의 안타도 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를 악물고 볼을 노려 보다가 드디어 첫 안타를 치게 되었고 그 것이 담장을 넘어가는 2점 홈런이 되어 경기를 뒤집는 승리 타점이 되었습니다. 감독의 눈에 든 구본혁 선수는 그 다음날도 주전 선수로 선발 라인 업에 포함되었고 멋진 수비를 하여 수비 코치로부터 과분한 칭찬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닝이 바뀌면서 수비를 마친 선수들이 덕 아웃으로 뛰어 들어오고 구본혁 선수도 그들과 함께 당당하게 덕 아웃으로 뛰어 들어 옵니다.

모든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고 멈춘다면 구본혁 선수는 성공한 프로 아구선수로 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구본혁 선수의 경력은 이제 막 시작하였을 뿐입니다. 앞으로 그가 헤쳐 나가야 할 길은 험하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의 타격이 발전하면 그에 따라 상대방 팀 투수들의 견제가 더욱 심하여질 것이고, 그가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그와 경쟁 관계에 있는 같은 팀 선수들이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엿볼 것입니다. 그가 계속하여 야구선수로서 살아 남으려면 피나는 노력과 뼈를 깎는 훈련이 거듭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야구선수로서는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편입니다. 신장이 180 쎈티 미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격이 작은 대신 몸이 날렵하여 순간 동작이 빠르다고 합니다. 그가 가진 약점을 보완하여야 할 것이고 장점을 백분 살려야 할 것입니다. 그의 나이로 보아 앞으로 최소한 10년 내지 15년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20년 가까이도 앞으로 선수 생활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의 경력이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걷게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난 주의 첫 안타 2 점 홈런과 다음날 이어진 멋진 수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많은 안타와 홈런, 도루, 승리 타점, 허슬 플레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수비에서도 더욱 든든한 수비를 해 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선수도 수비에서 실수를 한 번도 범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실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구본혁 선수는 루키이고 그의 커리어는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합니다. 한 두 번 잘 한 것은 오래 기억되지 못 합니다. 그러나 한 두 번의 큰 실수는 선수의 생명을 단축시키기도 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을 치르던 1969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월드 컵은 본선에 16 팀이 올라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시아에는 1 장의 출전권이 주어졌다고 하였지만, 실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를 한데 묶어 놓아서 실질적으로는 0.5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모든 국가들과 경기에서 우위를 점하여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놓고 호주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호주에서 벌어진 어웨이 경기에서 지고, 서울에서 호주와 홈경기를 하였습니다. 마침 1:1 동점인 상황에서 우리나라 팀이 페널티 킥을 얻었습니다. 운동장은 떠나갈 듯이 응원의 소리가 넘쳐났고 일부 관중은 마치 이기기라도 한 듯이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키커로 나선 공격수 임국찬 선수는 너무 긴장한 탓이었는지 그만 골 포스트를 훌쩍 넘어가는 실축을 하고 말았습니다. (관련기사: 아깝게 실축한 勝機_1969/10/21) 그 경기 결과는 무승부였고, 결국 우리나라는 호주에 1 1패로 져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맙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빗발치는 비난을 이기지 못한 임국찬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제대로 경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몇 해 후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 곳에서 청소년들에게 축구를 지도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한 번의 페널티 킥 실축이 한 선수의 선수 생명을 무너뜨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고교 야구에서 이름을 떨치던 선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윤몽룡 선수입니다. 그는 1972년 중앙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당대 최고의 투수이자 4번 타자로 활약하며 중앙고등학교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기도 하였고, 당시 최강 팀으로 부상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1953년생이어서 1972년에는 대학을 진학하여야 하였으나, 대전 한밭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고도 다시 중앙 중학교 3학년으로 한 해를 낮추어 입학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유망주 선수들에게 흔히 있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날리던 이 선수가 성인 야구에서는 그리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혹사 당하여서 그렇다는 진단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인이면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전 선수 명단에서는 제외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모처럼 대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무사 3루의 기회가 오자 감독은 윤몽룡 선수를 핀치 히터로 내보내면서 그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몽룡아 크게 휘두르는 척 폼을 잡다가 번트를 대라' 는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 감독은 코끼리라는 별명을 가졌고 호쾌한 야구를 보여주는 왕년의 홈런 타자였습니다. 상대 팀에서는 고등학교 시절의 강타자였던 윤몽룡 선수가 나오자 희생 플라이로 한 점을 내려는 것으로 추측하였고 번트는 전혀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은 바로 그런 헛점을 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윤몽룡 선수는 모처럼 온 기회에 번트를 대라는 지시가 몹시 못 마땅하였습니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존을 한참 벗어나는 공이어서 그냥 흘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공은 마침 상대 투수의 실투로 한가운데로 몰려 들어왔습니다. 그는 번트를 대지 않고 힘껏 뱃트를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볼은 빗맞았고 내야로 높이 뜨고 말았습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고 윤몽룡 선수만 아웃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윤몽룡 선수는 다시는 타석에 들어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안타깝게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날리던 야구 선수가 감독의 지시를 안 따른 탓에 유니폼만 입고 있을 뿐 그라운드에는 서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마감하였습니다.

운동 선수가 성적을 올리고 이름을 날리려면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조금씩이라도 성적이 쌓여 가면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무너지기도 합니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였던 임국찬 선수가 그랬고, 고등학교에서 4번 타자 투수로 맹활약을 하였던 아구선수 윤몽룡 선수도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후로는 그라운드에 서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맥투자증권이라는 증권회사는 4년 전 문을 닫았습니다. 직원의 주문 실수로 무려 400억원의 손실을 보면서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1995년에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던 영국의 베어링(Bearing) 은행이 문을 닫아야만 하였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1. 9. 23.참조) 이들 금융기관들은 그 동안 나름대로 영업을 잘 하여 왔고 적지 않은 이익도 쌓았던 금융기관입니다. 그러다가 단 한 번의 커다란 실수로 인하여 문을 닫아야만 하였습니다.

흔히들 하는 말 대로 99번 잘하였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잘 못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금융기관이 성공적으로 살아 남으려면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리스크 관리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이익을 낟 알 줍듯 하나하나 줏어다가 손실은 한 입에 몽땅 털어 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리스크관리를 철저히 하여야 합니다. 한 번의 큰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본혁 선수도 매일 매일 벌어지는 경기에서 최선을 다 하여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면서 실수하지 않도록 매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난 주에 있었던 멋진 홈런과 수비가 그의 경력에서 마지막 종착점이 아닌 멋진 시작으로 오래 기억에 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