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初年의 성공- 2020. 1. 17.

jaykim1953 2020. 1. 17. 02:16



제가 지금 머물고 있는 미국의 라스 베가스 지역 시간으로 지난  금요일 아침 TV 뉴스에서는 에드 번스 (Edd Byrnes)라는 87  배우의 죽음을 보도하였습니다. TV 아니라 주요 신문에도 비교적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관련기사: nytimes.com_2020/01/09_Edd-Byrnes-dead) 그러나 에드 번스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는 크게 알려진 배우가 아닙니다.

저도  배우는 그리 친숙하지는 않습니다만, TV 뉴스에서  배우를 소개하면서 ’77 Sunset Strip’ 이라는 TV 씨리즈에 출연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여 기억해   있었습니다. 77 Sunset Strip (77 Sunset Street intro)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TV 방송국이 생기고 방송을 시작하면서 외화를 방영하기 시작하였을  방영하였던 외화 가운데  편입니다. 미국 LA 북쪽의 썬셋 스트립이라는 지역의 77번지에 사무실을  탐정들의 사건 해결을 다룬 TV 단막극으로 매주 방영하였습니다. 에드 번스는  방송극의 인트로에 나오는  주연 배우 다음에 빗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차장에서 발레 파킹을 도와 주기도 하고 건물의 관리도 하면서 탐정들의 추리에 조언을 하는 그런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수시로 뒷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어 넘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영화 그리스 (Grease)에도 출연하였으나 그리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였고, 이렇다  대표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죽었다는 보도에서도 이미 60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77 썬셋 스트립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냈습니다. 그가 20 후반에 출연하여 크게 힛트한 TV 씨리즈 이후로는 그만한 작품이 없었다는 방증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단 에드 번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20대에 크게 성공하였으나  후로는 이렇다  성취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  있습니다. 일찍이 30  후반에 제가 속해 있던 은행에서 대단한 실적을 올렸고 그에 대한 보상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제가 속해 있던 은행의 본점이 있는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가면 이사회 의장 (회장) 은행장 (사장)  사람이 각각 시간을 따로 내어서 저와  둘이 식사를 하였습니다. 시간이  맞으면 아침 식사라도  함께 하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저는 우쭐하여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나   알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은행을 떠난 이후로는 제게 식사를 하자고 하는 고위급 인사가  이상은 없었습니다.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들과 2~3  독대를 하고 비즈니스 면담을  적은 있으나 그들이 저를 일부러 찾아서 식사를 하자고  적은 없습니다.

고위급 인사와 식사 자리를 하는 것이 성공의 가늠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나름대로 하나의 비유를   것입니다. 어쨌든 제가 30대에 보였던 성공 가도는  이후 그만한 성공의 수준에는 다다르지 못하였다고   있습니다.

비단 저뿐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일부 외국은행의 인사 가운데에는 젊은 시절에 대단히 촉망 받는 인재라고 여겨졌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서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인생을 살아 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일찍이 외국은행에서 성공하였으나 초년의 성공에 비하여  이후의 삶이 그리 화려하지 못하였던 예를  사람  되새겨 보겠습니다. 1970년대 말에 씨티은행 서울지점에 입행한 C 이야기입니다. 그는 저보다   위였으며 군대 3년을 마친 저와는 달리 그는 1년간 방위 근무를 하여 직장 생활은 저보다 3 년을 일찍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국내 최고라 불리는 고등학교 3  가운데 3번째에 해당하는 K 고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대학은 요즈음 소위 SKY 불리는 대학이 아닌  등급 아래로 불리는 S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직장 경력은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씨티은행에 입행하였을 때에는 그가 일하던 외환·자금 담당 트레져리 (treasury) 부서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보다 1 연장자인 K ,  사람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동료로서 함께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C 진급을 하고 K 진급에 누락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C 입행한 4~5 후에는 K C에게 보고를 하는 상하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에는 자금부서에 한국인 직원이 5~6명으로 늘어 났습니다.  직원들 가운데 C 가장 선임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두뇌도 명석하고 노력파여서 은행 업무를 정확히  파악하여 본국에서 파견 나온 고위급 책임자들의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업무의 의존도도 높았고, 급여와 직급 등의 보상도 두둑하였습니다.

 당시 그가 개발한 상품이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출과 선물환을 연계한 상품이었고,  하나는 외환 스왑 거래와 원화 예금을 결합한 상품이었습니다.

당시 외국은행들이 계속 상승하는 달러 환율- 가치가 하락하는 원화에 대한 대비책으로 헤지(hedge) 위한 달러 매입초과 포지션 (overbought position 또는 long position) 비축하기 원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많은 기업들이 대출을 받기 원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대출을 받아 가기 원하는 기업은 선물환으로 달러를 외국은행에 매각하도록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출이 필요하므로 대출을 받아가고 후에 수출대전으로 생기는 달러화를 매각할 것을 선물환으로 약정하는 것입니다. 대출과 선물환을 연계한 상품은 결국 기업에게 대출을  주면서 선물환으로 달러를 은행에 매각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물환율은 외국은행의 입장에서 충분한 이익을 창출할 만한 환율에 약정하였습니다. 이를 외국은행의 입장에서 헤지  (hedge loan)이라 이름지었고 C 당시에 만들어낸 대단한 상품이었습니다.

그리고 헤지 론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서는 달러를 매각하여 원화 자금을 조성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행에서 정한 가이드 라인은 이를 제한합니다. 국내 통화량 조절을 목적으로 국내 금융기관이 현물환 포지션을 매도 초과 포지션 (oversold position 또는 short position) 유지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대출재원을 위하여 달러를 매각하면 매도 초과 포지션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중앙은행이 금지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C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에게 달러를 현물환으로 자신의 은행에 팔고 선물환으로 되사는 외환 스왑 거래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외환 스왑 거래로 생긴 자금을 자신의 은행에 원화로 예금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원화 예금 이자는 시중 은행과 같이 지급하지만 외환 스왑을 통하여 높은 보상이 가능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외환 스왑 예금이라 이름 짓고 헤지 론의 재원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외환 스왑 예금은 고객에게 높은 보상을  주어야 했으나 선물환을 연계한 대출을 통하여 훨씬  많은 수익을 올렸으므로 은행에게 효자 상품이었습니다.

C 이러한  가지 상품을 만들어 내면서 본사로부터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지 상품은 외부에 일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C에게서 이러한 상품을 배운 후배 직원들 가운데 일부가 다른 은행으로 이직하면서  상품들을 카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외국은행에  상품이 모두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C 트레져리 부서에서 항상 외국인 책임자 밑에서 일하였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고 판단한 C 1980 중반 후선 부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가 후선 부서로 자리를 옮긴 얼마  트레져리 부서의 외국인 책임자가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C 후배 한국인 직원이 트레져리 책임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를  C 자신의 불운을 탓하면서 조기 퇴직을 신청하여 은행을 퇴직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곳에서 우리나라 은행의 현지 지점에 취직하여 평범한 은행원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모든 직장 생활을 접고 은퇴후의 생활을 즐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30 , 중반에 보여 주었던 천재적인 머리 회전과 상품 개발 능력, 시장 관행의 응용력을 생각해 보면 그의 나중은 매우 아쉬움이 남는 인생이었습니다.

마치 에드 번스가 초반의 77 썬셋 스트립에서 보여준 성공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였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초년(初年) 성공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금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젊은 사람들도 보다 정진하는 모습으로 일찍이 경험한 성공을 오랫동안 이어갈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