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언론의 정치, 사회 분야에서는 ‘갑’, ‘을’ 논쟁이 치열합니다.
원래 ‘갑’이니 ‘을’이니 하는 것은 과거 한자 문화에서 유래한 10간(干) 12지(支) 가운데 앞에 쓰이는 10 간의 순서-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甲, 乙, 丙, 丁, 戊, 己, 庚, 申, 壬, 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아주 옛날(일제시대)에는 성적을 표시할 때에도 ‘수우미양가 ‘(秀優美良可) 대신에 ‘갑을병정무’를 사용하였다고도 합니다. 한자어에서 갑남을녀(甲男乙女), 갑론을박(甲論乙駁)과 같이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들을 일컬을 때에도 ‘갑’ ‘을’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일상생활에 흔히 쓰이던 ‘갑을병정…’이 요즈음에는 ‘갑’과 ‘을’의 주종(主從)에 가까운 관계와 지위의 우열(優劣)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갑’과 ‘을’은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측과 상대적 열세인 측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갑’과 ‘을’이 이런 의미로 통용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계약서의 용어 때문입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우리나라 정부투자기관과 컨설팅 계약을 맺었던 문건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 시작은;
XXXX공사 (이하 “갑”이라 한다)와 크로스 컨설팅의 김재호 (이하 “을”이라 한다) 간의 금융 자문에 관한 협약을 다음과 같이 체결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계약서의 계약 당사자들을 한 쪽은 ‘갑”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쪽은 ‘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계약서에서 ‘갑’이라고 불리는 계약 당사자는 항상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을’은 ‘갑’의 우월적 지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위의 계약서에서 보듯이 저도 ‘을’이었습니다.
제가 맺은 영문 계약서도 한번 살펴 보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에 맺은 컨설팅 계약서의 시작은 이랬습니다;
This agreement is, hereby, entered into between XXXX Co. Ltd. (hereinafter “Client”) located at 000 OX St. XO, XX, 00000, USA and Cross Consulting LLC (“Cross” hereinafter) located at 212 E 47th St., New York, NY 10017, USA and shall be in effective as of the date of signing by both parties named above.
번역하면;
이 계약서는 미국 XX 주 XO 시 OX 가 000 번지 (우편번호 00000) 에 소재한 XXXX 주식회사 (이하 “고객”이라 한다)와 미국 뉴욕주 뉴욕시 이스트 47가 212번지 (우편번호 10017)에 소재한 크로스 컨설팅 회사 (이하 “크로스”라 한다) 사이에 맺어진 것으로, 상기 양측 당사자가 계약서에 서명 날인하는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표면상으로는 ‘갑’과 ‘을’ 같은 불평등한 느낌의 표현은 보이지 않습니다. 위의 계약서에서는 한 쪽을 ‘고객’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쪽은 이름을 축약하여 부릅니다. 그렇다고 영문으로 작성한 계약서라고 하여서 실제 내용이 완벽하게 평등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영어로는 ‘buy side’와 ‘sell side’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무엇인가를 꼭 팔아야만 하는 sell side의 입장은 ‘을’, 그리고 골라서 살 수 있는 buy side는 ‘갑’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비록 계약서에 ‘갑’, ‘을’과 같이 표현을 하지 않았다 뿐입니다.
제가 10여년 전 생명보험회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생명보험회사들은 수조 원, 또는 수십 조 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대형 기관투자자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브로커인 증권회사나 여타 금융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생명보험회사는 ‘갑’, 자신들은 ‘을’이 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보험회사에서 일하기 전에는 늘상 ‘을’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생명보험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갑’의 입장이 되었을 때에도 ‘을’에게 괴로움과 부담을 초래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일하던 보험회사가 국내에 있는 외국계 투자은행(IB; Investment Bank) 5 곳에 RFP(Request For Proposal; 프로포절 요청서)를 보냈습니다. 4 곳의 은행은 문제가 없었으나 한 곳- C은행에서는 저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조금은 변형된 거래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C은행의 제안대로 하면 저희가 원치 않는 새로운 리스크를 유발하게 되어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변형된 거래는 곤란하다는 의사를 C은행에게 분명히 전달하고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C은행에서는 저희 회사의 다른 임원 S씨를 통하여 ‘C은행이 선택되지 않아도 좋으니 프리젠테이션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S씨는 저와 상의도 없이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S씨는 제게 ‘어차피 탈락할 것인데 프리젠테이션도 못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마도 S씨는 ‘갑’의 지위에서 시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을’의 입장에서 오랜 동안 일해 보았고 C은행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되지도 않을’ 일을 준비하는 ‘을’의 노력과 결과에 따른 좌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C은행이 프리젠테이션을 하려고 저희 회사에 들어 왔을 때에 함께 온 사람들은 모두 4명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한 사람은 홍콩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저희 회사 S씨에게 부탁을 하였던 서울지점 직원이 함께 들어 왔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과정에서 저는 단호한 어조로 C은행이 제시한 방법이 저희 회사에 가져다 주는 새로운 리스크에 대하여 지적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C은행이 채택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C은행은 ‘을’이었습니다. ‘을’이 시간과 비용을 부담하면서 불가능한 거래를 제안하려고 뉴욕, 홍콩에서 고위직 사람들을 한국까지 오게 만드는 것은 ‘갑’의 횡포에 불과합니다. 바람직하기는 처음부터 제안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 주었어야 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 하였고 C은행은 이룰 수 없는 결과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금도 저는 후회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을’이 아닌 ‘을’의 ‘을’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 난 기사를 보면 (관련기사: 2013_8_7_중앙일보_너와나의거리) ‘을’의 ‘을’이 겪는 아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을 옮겨 봅니다;
12년째 배달 일을 하는 백모(53)씨. 그는 “고객들의 짜증에 상처를 받곤 한다”고 했다. “박스 나르면서 공무원 분께 ‘좀 도와주실 수 있느냐’고 했어요. 그분이 납품 업체에 전화를 걸더군요. ‘지금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는데 왜 저런 사람을 보냈느냐’고. 업체가 을(乙)이고 저희는 ‘을의 을’이니까 아예 사람으로 안 보는 거죠.”
‘갑’이 ‘을’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을’의 ‘을’에게 부리는 횡포는 더욱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 ‘갑’은 이를 한껏 이용합니다. ‘갑’이 계약서 수정을 요구하면 ‘을’은 그에 응하여야 합니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갑’은 ‘을’을 무시하고 고사(枯死)시키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계약서에 의한 ‘을’과의 거래를 ‘갑’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콧합니다. ‘을’이 쏟아 부은 시간과 노력, 자원, 비용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횡포로 인하여 ‘을’이 겪게 되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심적인 쓰라림은 ‘갑’의 관심 밖입니다.
‘을’이 없이 ‘갑’ 혼자서 성공하고 잘 될 수는 없습니다. ‘갑’과 ‘을’은 공생(共生)의 관계입니다. 경제 논리에 따라 평등하게 작성된 계약서의 정상적인 이행이 건강한 경제활동으로 이어집니다. ‘갑’이 즐기는 우월한 지위의 횡포가 ‘을’뿐 아니라 경제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 가운데 스스로가 ‘갑’의 위치라는 것을 아신다면, ‘을’에게 대하는 행동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갑’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누릴 때에 거기에는 말 못하는 ‘을’의 아픔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지난 주 금요일 모닝커피 100회를 축하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이메일 격려 메시지, 와인, 화환 등 제가 받은 모든 선물과 격려에 일일이 찾아 뵙고 감사 말씀 드려야 하나 일단 지면으로 감사의 말씀을 먼저 전해 드립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1~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각의 차이- 2013. 8. 30. (0) | 2013.08.30 |
---|---|
PIMCO-2013. 8. 23. (0) | 2013.08.23 |
100번째 금요일 모닝커피- 2013. 8. 9. (0) | 2013.08.09 |
정경분리-2013. 8. 2. (0) | 2013.08.02 |
불경기- 2013. 7. 26. (0) | 2013.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