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4~2016

변화 그리고 생존- 2014. 12. 26.

jaykim1953 2014. 12. 26. 10:55

지난 일요일 12 21일에는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헌금 시간에 특송으로 유아부 어린이들이 나와서 찬양 동요 3곡을 불렀습니다. 저의 손자도 유아부 합창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동작을 하며 입을 크게 벌려 짹짹거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마냥 귀엽기만 하였습니다.

손자는 며칠 후면 우리 나이로 5살이 됩니다. 누군가는 미운 다섯 살이라고도 합니다만 눈에는 마냥 예쁘기만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다섯 또래의 어린이를 돌보아준 것은 지금부터 40년도 훨씬 지난 예전의 일입니다.

제가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였던 1972 1 말쯤이었습니다. 외사촌 누나가 저의 대학 입학을 축하한다고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여서 집에 찾아 갔습니다. 외사촌 누나는 제게 용돈을 쥐어주고 점심 식사도 대접해 주었습니다. 외사촌 누나의 딸이 우리 나이로 다섯 살이었습니다. 별명이 똘똘이었고, 별명만큼이나 똑똑하고 예뻤습니다. 똘똘이는 저를 무척 따랐고 좋아하였습니다. 제가 일어서려 하자 삼촌 가지마라며 마구 울면서 막무가내로 저를 가게 하였습니다. 없이 주저 앉기를 차례 하다가 결국에는 제가 똘똘이를 데리고 저희 집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저는 똘똘이의 외당숙, 또는 5 아저씨이지만 똘똘이는 그냥 손쉽게 삼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저의 키는 이미 180 쎈티 미터를 훌쩍 넘은 키였고, 똘똘이는 아직 자그마한 다섯 살짜리 어린 아이였습니다. 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똘똘이는 손을 한껏 위로 쭈욱 뻗어 손을 겨우 잡고 타박타박 걸었습니다. 저의 외사촌누나는 저와 함께 걸어가는 똘똘이의 뒷모습이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눈물이 지경이었다고 나중에 제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희 집에 똘똘이는 저와 즐겁게 놀다가 저녁이 되고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사촌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똘똘이를 저희 집에서 재워서 보내겠다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똘똘이는 전화기 너머로 자기 엄마가 해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 똘똘이 나팔바지 벗구, 닦구, 삼촌 듣고, 엄마 안녕…!!!”

대강 이런 대화를 마치고 이도 닦고, 당시에 유행하던 나팔바지도 벗어서 개어 놓고, 제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들어가서 잤습니다.

똘똘이 가족은 그로부터 1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워싱턴 D.C. 근교에서 살았습니다. 똘똘이는 이미 오래 전에 시집 가서 지금은 똘똘이의 아들이 대학을 다닌다고 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똘똘이의 모습은 등에 작은 백팩을 메고 아빠 엄마 손을 잡고 김포 공항에서 손을 흔들며 바이바이 외쳐 주던 어린이입니다. ‘삼촌 안녕이라고 하면서 목을 꼬옥 안아주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똘똘이의 어린 모습만 기억하는 제게 똘똘이의 아들이 대학에 다닌다는 것은 얼른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안 40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상황입니다. 제가 직접 눈으로 보지만 못하였을 똘똘이는 미국에 도착하여 영어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마치는 성장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아 육아에 힘썼을 것이고 오늘에 이르러 아들이 대학에 가기까지 많은 노력과 활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중간 과정을 전혀 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 김포공항에서 작별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제게는 똘똘이의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는 소식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순수 민간은행으로 처음 설립된 은행이 신한은행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자본금을 모아 설립한 은행입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소위 5 시중은행이 금융산업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5 시중은행이란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신탁은행이었습니다. 조흥은행은 최초 설립년도가 1890년대입니다. 가장 늦게 세워진 서울신탁은행은 서울은행 설립이 1959, 신탁은행과의 합병이 1970년대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금융업의 연륜에서 짧게는 20 이상, 길게는 90년을 바라보는 은행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신한은행이 처음으로 영업을 시작하고 은행간 콜자금 거래와 외환거래를 시작하던 날이었습니다. 신한은행에는 신한은행의 영문이름이 무엇인지를 묻는 전화가 외국은행 국내 시점으로부터 많이 결려 왔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과장, 대리급 직원들이 신한은행의 영문 이름을 신한(新韓)이라는 글자에 충실하게 번역하여 ‘New Korea Bank’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Shinhan Bank’ 정정하는 혼란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영업 개시 첫날부터 영문 이름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급하게 문만 열었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나라 금융시장에는 KDB산업은행, 우리은행, KB국민은행, 하나은행 등과 함께 신한은행은 국내 은행의 금융지주 그룹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30여년 창립 당시를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입니다. 때의 5 시중은행 가운데 지금 제대로 남아 있는 은행은 곳도 없습니다. (참조: 금요일 모닝커피- 우니라나 사회와 은행의 변천사-2012.9.14.)

신한은행의 영업일에 영문 이름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하던 모습만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신한은행이 국내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 같은 변화일 것입니다. 동안의 주변환경 변화와 은행들의 생존을 향한 변화를 여겨 보아야 합니다.

지나 어려운 경영환경- 특히나 1997~1998 년에 경험한 IMF 구제금융 아래에서의 경제위기, 2008년에 전세계를 휩쓴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과거의 5 시중은행은 커다란 덩치를 감당하기에는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반면 후발주자로서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던 신한은행, 하나은행 등은 영업환경의 변화에 맞는 경영을 표방하면서 많은 노력과 어려움을 겪어 나왔습니다.

불과 30 전의 우리나라 금융시장과 오늘의 금융시장이 이렇게 달라졌듯이 앞으로 30 후에는 다시 어떤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 올지 없습니다. 금융시장의 변화도 적자생존(適者生存) 원칙이 적용되는 곳입니다. 어제의 화려한 역사가 내일의 번영을 약속하지 못합니다. 미국 GE (제네랄 일렉트릭) CEO이면서 변화관리의 선봉에 섰던 웰치 (Jack Welch) 이야기- ‘떠밀려서 하기 전에 미리 변화하라’ (Change before you have to.)라는 말을 곱씹어보게 됩니다. 지금 나가는 기업, 은행들이 앞으로 20, 30 뒤에도 계속 나가는 기업, 은행으로 살아 남으려면 스스로 변화에 성공하여야 합니다. 환경이 바뀌는 것을 미쳐 감지하지 못하면 아무리 나가는 기업과 은행이라 할지라도 고사(枯死)하게 됩니다. 생존을 위하여서라도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변화하여야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손자의 유아부 특송을 기억하는 분들 가운데 앞으로 30년쯤 후에 손자가 성장한 모습에 놀라실 분도 있을 있습니다. 오늘의 손자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30, 40, 또는 50 후에 깜짝 놀랄 멋진 변화가 손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서 손자도 많은 노력을 하여야 것이고 또한 훌륭한 결과가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