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프랑스에 와 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서울을 떠나 파리오 왔다가 지금은 남부 프랑스의 니스에 와 있습니다.
이 곳에 오니 제가 어렸을 적에 듣던 샹송들이 생각이 납니다. 제목은 ‘파리의 다리 밑’이라는 곡입니다. (파리의 다리 밑- 동영상) 제가 듣기로는 20세기 초반에 발표된 노래라고 하니 우리나라 가요로 치면 목포의 눈물이나 눈물 젖은 두만강보다도 더 오래된 노래일 것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그 당시 저보다 8살 위인 고등학교 1학년의 사촌 형 C로부터 입니다. C 는 음악을 좋아하여 학교에서 밴드 활동을 하며 드럼을 쳤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기타도 잘 쳤고 노래도 곧잘 불렀습니다. C가 이따금 기타를 치면서 이 파리의 다리 밑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이 어린 저는 C가 굉장히 멋 있게만 보였고 그 형이 부르는 노래들을 좋아하였습니다. C가 부르던 노래 가운데에는 그 당시 대단히 히트하였던 닐 세다카(Neil Sedaka)의 오 캐롤(Oh Carol)이라는 노래도 있었습니다. (오 캐롤 동영상)
C는 모두 6 남매 가운데 막내였습니다. 맨 위의 첫 번째 누님은 C보다 20살 이상 위였고, 그 밑으로 장남인 H가 있었습니다. H는 C보다 8살 위였으며 공부도 잘 하여서 서울 공대를 졸업하고 유학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미국의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에 비하면 C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음악, 운동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싸움을 잘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C의 싸움 장면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째는 어느 더운 여름 날 C의 집에서 C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는데 바깥 골목에서 한 학생이 C의 집 담벼락에 축구공을 차서 튀어 나오면 다시 받아서 담벼락에 차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C는 바깥으로 나가 그 학생에게 남의 집 담벼락에 공을 차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창 밖으로 내다 보고 있던 저는 그 때의 장면을 생생하게 모두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학생들이다 보니 담벼락에 공을 차던 학생은 C를 아는 듯 했습니다. ‘너 S고 1학년이지? 난 그 옆에 있는 D고등학교 3학년이야’라고 C를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C는 ‘그래서? 우리 집 담에 공 차지 말라니까?’ 라고 대꾸하며 눈을 아래 위로 흘겨 보았습니다. 그러자 상대 3학년 학생이 대뜸 욕을 하며 주먹으로 C를 때리려 하였습니다. 그 순간 마치 액션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C는 잽싸게 주먹을 피하고 상대방 목 뒤를 잡아 끌어 얼굴을 밑으로 당기면서 무릎으로 상대방 얼굴을 가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얼굴이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고 썩은 나무 쓰러지듯 쓰러졌습니다. C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유유히 집 안으로 들어왔고 상대방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말없이 골목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로 C의 활약상(?)을 목격한 것은 같은 해 겨울입니다. C와 함께 저는 당시 서울 운동장 (지금의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 자리) 스케이트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갔습니다. 그 때에는 겨울이면 육상 트랙에 얼음을 얼려서 스케이트 장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불과 15~20 분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오전에 가서 스케이트를 타고 점심 때쯤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마침 빨간색 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는데 웬 고등학생 3~4명이 저를 손가락질하며 ‘사내녀석이 왜 계집아이처럼 빨간 옷을 입고 다니냐?’고 비웃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C는 돌아서서 그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너희들 지금 뭐라고 했어? 얘가 무슨 색 옷을 입던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야?’ C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상대 학생들은 그들이 수적으로 우세함을 믿어서인지 C에게 덤벼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C는 전광석화와 같이 몸을 날려 이들의 공격을 피하더니 몸을 날려 발길질과 주먹으로 이들을 때려 눕혔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고 난 후 저는 C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이 형과 함께 있으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C는 K대학 화공과로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K대의 체육과 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K대는 체육과가 명성을 날리던 학과였습니다. 그리고 체육과답게 그 학과 학생들은 군기도 세고 거칠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체육과 학생들을 상대로 C가 혼자 맞붙게 되었습니다. C는 수십 명을 상대하여 싸움을 지속하다가 지쳐서 결국은 흠씬 두들겨 맞고 말았습니다. C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타일러서 일단 학교를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군을 제대하고 복학하여 마음잡고 조용히(?)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C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 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평화롭게 잘 지냈습니다. 그러던 C의 소식을 최근에 듣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러하지만 C도 현금 매출에 대하여서는 세금 보고를 성실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금이나 노후대비를 위한 금융 상품에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금융기관에 돈을 맡기게 되면 자산 규모가 드러나고 수입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세금을 적게 내려고 수입을 축소 신고하다 보니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기피하였던 것입니다.
C는 약 7~8년 전에 부인과 이혼하였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면서 부인과 단 둘이 남게 되었고 나이가 들어 모든 사업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C는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과 담배를 끊지 않았고 부인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느낀 부인이 이혼 소송을 하여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어서도 노후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데다가 이혼으로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부인에게 떼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재산으로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럴 때 하필이면 이자율은 제로 금리시대로 진입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의 원금을 야금야금 깨서 써야만 했습니다. 그러기를 7~8년 하다 보니 이제는 재산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 나이가 이미 70을 넘긴 C는 아들 딸과 친구, 친척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곳 프랑스에도 노년에 황혼 이혼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젊어서부터 노후대비를 하고 또 국가가 준비한 사회 보장제도에 의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는 일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이혼을 하지 않더라도 노후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으면 말년의 생활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눈 앞에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 미리미리 노후대비를 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이자율이 낮다 하더라도 꾸준히 저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노후대비임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4. 4. 4.) 더 늦기 전에 지금 당장이라도 노후를 대비한 저축을 시작하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 중에 가장 빠른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들 모두 후회하지 않을 노후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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