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무척 덥습니다. 지난 해 여름도 더웠지만 1년 전의 일이라 잊혀져서 인지 금년 여름이 더 덥게만 느껴집니다. 신문기사를 보면 지난 7월 22일 이후 8월 7일까지 17일 동안 모두 15번의 열대야가 있었다고 합니다. 단 2일을 빼고는 매일 열대야가 이어진 것입니다. 지난 해에는 같은 기간 동안 열대야가 5번뿐이었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news.joins.com_2016/8/7-열대야)
또 엊그제 신문기사를 보면 금년의 이러한 더위는 최근까지 기록상 최고의 더위였던 1994년의 더위에는 족탈불급(足脫不及: 신발을 벗고 뛰어도 쫓아가지 못함)이라는 것입니다. 열대야 날짜 수도 그러하거니와 최고 기온에서도 1994년에는 38.4도를 기록하였고 금년에는 36도가 최고였다고 합니다. 평균기온도 1994년에는 금년보다 1.5도 더 높았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chosun.com/2016/8/9_유례없는더위)
이렇게 날씨가 더워진 원인을 다들 엘니뇨, 라니냐와 같은 스페인어로 지어진 이름의 기후 현상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위의 신문기사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그렇게 더웠다던 1994년 여름에도 7월말과 8월초에 2 개의 태풍이 지나가면서 잠시나마 숨을 돌릴 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태풍조차도 우리나라를 비켜가기만 한다고 합니다. 태풍의 피해는 미리 대비하여야 하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더위를 식혀 줄 수 있는 태풍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태풍과 관련하여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남다른 기억이 있습니다.
1986년 가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체이스 맨핫탄 은행 (CMB) 서울지점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헤드 헌터의 소개를 받아 파리바 서울지점과 접촉하여 이직을 제안 받았습니다. 저는 나름 신중하게 생각하여 이직을 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파리바 서울 지점장, 부지점장 등과 인터뷰도 하였습니다. 서울 지점장과 부지점장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홍콩으로 가서 홍콩에 있는 파리바 아시아 지역 헤드, 투자은행 업무와 외환, 자금 총책 등과 인터뷰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체이스 맨핫탄 은행에 며칠간 휴가를 내고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1986년 10월 초의 일입니다.
서울에서 오후 비행기를 타고 홍콩에 저녁 때쯤 도착하였습니다.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날 있을 인터뷰 생각을 하며 제 나름대로 새로운 은행에서의 비즈니스 플랜에 대한 구상을 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약속 시간에 맞추어 파리바 은행 홍콩 지점으로 갔습니다. 오전에 3~4명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아시아 지역 담당 책임자였던 프랑스 사람 기욤 (Guillaume)이라는 사람과도 오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기욤은 제가 파리바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아 파리바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터뷰할 때 보고 그 이후에는 다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기욤은 그의 퍼스트 네임이고 우리나라 이름의 성(姓)에 해당하는 라스트 네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기욤이 제게 많은 것을 꼬치꼬치 물었고 앞으로의 비즈니스 플랜에 대하여 구체적인 질문을 많이 하였습니다. 기욤 이외에도 몇 사람 더 만났고, 그들과 점심도 함께 하며 인터뷰가 계속되었습니다. 식사 시간에도 이어지는 인터뷰로 인하여 편안한 식사를 하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생각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프랑스 사람들은 점심을 오후 1시쯤 시작하여 2 시간씩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프랑스 사람들과의 면접이 끝나고 오후 3시가 지나서 파리바 홍콩에서 투자은행 업무 + 외환, 자금 업무의 총책임자인 조 유 (Joe Yu)와의 인터뷰가 시작되었습니다. 조 유는 홍콩 시장에서는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 당시 홍콩의 금융시장 전체에서 조 유가 거의 최고 거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 유와 처음 인터뷰를 시작할 때에는 저도 몹시 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와 저는 마치 친구 같이 가까워졌습니다. 조 유는 저보다 나이가 5~6년 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를 친절하게 대하여 주었고, 자기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는 저의 자세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시장 상황과 전망 등에 대한 저의 설명을 듣고 흡족해 하면서 앞으로 함께 한국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잘 해 보자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아 인터뷰를 통과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 유는 제가 파리바 은행에서 근무를 시작한 후에 서울에 와서 저와 함께 여러 한국 기업들을 상대로 마케팅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파리바에서 근무를 시작한 첫해에만 2~3 차례 더 서울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그는 파리바 본점의 요구로 홍콩에 중국 시장을 카버하는 자산운용사를 새로이 설립하면서 그 회사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더 이상 저와 비즈니스를 함께 이어가지는 못 하였습니다.
조 유는 저를 좋게 보았던지 제가 홍콩에 가서 연락을 하면 항상 반갑게 맞이 하여 주었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홍콩 출장 길에 저의 집사람과 동행하였습니다. 이를 알고 조 유는 저희 부부를 저녁에 초대하였습니다. 식사 장소는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중식당 북경루 (北京樓, Peking Garden)로 잡았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 시간이 임박하여 조 유에게서 연락이 다시 왔습니다. 저의 집 사람이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의 집사람에게 중국음식은 별로 맞지 않을 것이므로 장소를 뱅커스 클럽(Bankers’ Club)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조 유는 저의 집사람이 가리는 음식까지 신경 써주는 아주 사려 깊고 세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1986년으로 돌아가서 제가 파리바 인터뷰를 할 때 이야기입니다. 조 유와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는 동안 조 유의 비서가 저희가 있는 방으로 잠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홍콩 지역에 태풍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가급적 일찍 퇴근하고 다음 날에는 방송을 귀 기울여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홍콩 정부가 일반 직장인들의 출근 여부를 방송을 통하여 통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올리비에 못 (Olivier Motte)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조 유 다음으로 저와 인터뷰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리비에 못은 조 유의 부하 직원이었습니다. 조 유는 자신의 비서에게 저를 가리키며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올리비에보다 상급자 지위에서 우리 회사 일을 할 사람이다. 올리비에가 이 사람을 인터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올리비에 못은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금융기관 경력도 저보다 짧았으며, 포지션도 조 유의 어시스턴트 (assistant) 역할을 하는 상대적으로 주니어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태풍이 접근하고 있다고 하니 조 유는 제게 어서 호텔로 돌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서에게 한 마디 더 말하였습니다. ‘Enough is enough.’ 우리 말로는 ‘충분히 했어’ 또는 ‘할 만큼 했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저에 대하여 충분히 알아낼 만큼 인터뷰를 하였으니 더 이상 인터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 지역 투자은행 업무와 외환, 자금 업무의 최고 책임자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저는 마음 속으로 ‘됐다’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조 유는 올리비에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이라고 저를 소개하였습니다.
저는 조 유와 작별 인사를 하고 서둘러 호텔로 돌아 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하며 결과가 좋을 것 같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홍콩 지역에 태풍이 오고 있어 혹시라도 다음 날 예정대로 비행기가 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도 이야기했습니다.
그 날 저녁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일찍 호텔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긴 저녁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행히 로비의 바에서 제 또래의 뚱뚱한 중국 사람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맥주 한 잔을 마시며 그의 노래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TV를 켰습니다. 뉴스는 온통 태풍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지난 밤에 태풍이 얼마나 심하게 피해를 주었는지를 보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행스럽게도 태풍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하여 홍콩 지역을 이미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예정대로 비행기를 타고 그날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1986년 11월부터 파리바 은행에서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파리바 은행에서 근무를 시작하기 약 한 달쯤 전에 홍콩에는 태풍이 왔었습니다.
지금쯤 우리나라에 태풍이라도 오면 조금은 더위가 누그러질 듯도 한데 말입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4~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로벌 시대- 2016. 8. 26. (0) | 2016.08.27 |
---|---|
2016년 8월미국의 이자율- 2016. 8. 19. (0) | 2016.08.22 |
1980년을 회상하며...- 2016. 8. 5. (0) | 2016.08.05 |
영어 이름- 2016. 7. 29. (0) | 2016.07.29 |
RCPS- 2016. 7. 22. (0) | 2016.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