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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도덕성- 2017. 8. 18.

jaykim1953 2017. 8. 18. 10:12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내용입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 잘 나간다고 하던 10대 재벌입니다;

1950년대 10대 대기업 (지료:한국경제통사 이헌창 고려대 교수)

 

 

 

 



기업명 (창립연도)



계열기업(1961현재)



주력산업



삼성 (1938)



13



무역, 식료품, 금융



삼호 (1950)



7



무역, 석유, 금융



개풍 (1949)



9



무역, 시멘트. 금융



대한 (1946)



5



무역, 식료품, 섬유



럭키 (1947)



4



무역, 화학



동양 (1953)



4



시멘트, 식료품



극동 (1947)



4



무역, 조선



한국유리 (1954)



2



무역, 유리



동립 (1949)



2



식료품



태창 (1916)



2



무역, 섬유

 

 

 

 

 

 

 

이 가운데 현재까지도 10대 기업으로 남아 있는 곳은 삼성과 럭키 ( LG) 정도입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기업들의 이름은 듣기에도 생소합니다만 그 가운데 제가 기억하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동립입니다. 이 회사는 한자로 東立産業이라고 썼으며, 5.16 군사혁명 직후 부정축재 환수조치에 따라 국유화된 회사입니다. (관련기사: 1962.11.2. 동아일보- 동립산업국유화) 이 회사의 제품은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밀가루와 설탕이었습니다. 상표는 부라운이었고 한자로 富羅運이라고 썼습니다. 이 당시에는 미국의 공법 480 (PL480)에 의한 원조물자로 밀과 설탕 원료인 원당이 들어오던 시절이었고, 이를 받아 밀가루와 설탕을 만들어서 판매하며 크게 사업을 일으켰던 회사입니다. 이 회사 사주 H회장의 아들이 군 복무 기간 중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 집에 있다가 무단 침입한 도둑을 권총으로 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병이 권총을 가지고 무단 외박을 하며 미녀 배우의 집에서 기거하는 등 당시 재벌의 일탈과 부패한 모습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관련기사: 1972.6.15.경향신문-선고유예)

 

동립산업은 지금은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진 기업이지만 불과 45년 전까지만 하여도 국내 굴지의 기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기업의 소유주가 부도덕한 나머지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 기억에서 잊혀져 간 기업입니다.

 

우리나라의 재벌 기업들 가운데에는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자본주의를 시험하던 초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부는 용케 살아 남았고 일부는 성장하지 못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한 동안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하던 기업도 기업주의 자살로 나락으로 떨어진 예도 있습니다.

 

P 회장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해방 직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그의 부친은 평양에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에게 휘발유를 공급해주는 사업을 하여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첫 부인이 있었으나 사별하고 P회장의 어머니를 후취로 맞아 들였습니다. P회장에게는 이복형이 한 분 있었고, 그의 형은 일찍이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P회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국석유저장공사가 있었습니다. 5.16 군사혁명 후 1962년에 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한 석유공사법이 제정 되었습니다. 석유공사법에 의하여 설립된 석유공사는 영어로 Korea Oil Company, 줄여서 KOCO 입니다. 이 회사가 미국의 걸프(Gulf)사와 합작으로 울산에 정유공장을 건설하였습니다. 그 반면 1962년 이전의 석유저장공사는 영어로 Korea Oil Storage Company, 줄여서 KOSCO 였습니다.

 

P회장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당시에 많지 않은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업가였습니다. P회장의 부친은 P회장을 앞세워 석유저장공사의 경영진과 대화 채널을 만들고 그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인 유류 도소매업에서 상당한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P 회장은 부친의 사업을 도우면서 부사장의 자리에 올랐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석유저장공사를 자주 출입하던 P 회장은 그 곳에서 사장 비서로 일하는 L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L씨는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하여 미스 서울 미()에 당선된 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외국기관인 석유저장공사의 사장 비서를 하고 있었습니다. P 회장은 L씨와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부인과는 이혼을 하고 L씨와 다시 결혼을 하였습니다.

 

P회장이 L씨와 결혼한 직후 P회장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회사의 지분 분쟁이 있었으나 P회장의 모친과 P회장의 동생이 소유한 지분이 있어 P 회장은 자신의 이복형을 누르고 사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5.16 군사혁명 직후에는 P회장은 권력의 2인자라 불리는 실세 K씨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K씨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 P회장은 대기하고 있던 K씨의 차가 일제 토요타 소형 세단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타는 쉐볼레 임팔라 승용차에 K씨가 오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K씨에게 계속 그 차를 사용하라고 하면서 자신의 운전기사를 내리게 하고 K씨의 운전기사가 그 차를 운전하여 가도록 하였습니다. 5.16 군사혁명 직후 군부의 서슬 퍼런 부정부패 척결의 칼날이 거의 모든 돈 많은 사람들을 표적으로 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P회장은 군사정부의 표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P회장은 자신의 사업 영역을 넓혀 갔습니다. 외국에서 중고 선박을 사들여 용선(傭船)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전세계적으로 석탄, 곡물 등을 실어 나르는 벌크 카고(bulk cargo) 선박 사업이 높은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한 푼의 외화라도 더 벌여 들여야 한다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때에 선박 용선 사업으로 외화를 벌어 들이는 P회장은 정부의 외화벌이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애국 사업가로 꼽혔습니다.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하였습니다. 1970년대 말 국내 해운업계는 과잉투자와 선박 가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P회장은 어려움에 빠진 해운회사들을 인수하면서 회사의 덩치를 키워, 국내 선박회사 가운데 가장 큰 선박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해운업계에는 컨테이너 운반선의 시대가 열리면서 벌크 운송선(bulk carrier)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해상 운송이 컨테이너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해운=컨테이너 운송의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하였습니다. 벌크 운송선을 주력으로 하는 P회장의 회사는 경영에 더욱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회사 내부 경영진과의 갈등이 발생하면서 회사의 비자금 문제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P 회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창 밖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P회장의 자살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처음에는 멋쟁이 영국 신사 경영자를 잃은 안타까움으로 칭송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는 회사의 비자금을 해외에 숨겨 놓은 부도덕한 재벌 오너로 보도되었습니다.

 

동립산업의 H 회장과P회장뿐 아니라 많은 재벌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뒷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1970년대의 성장 드라이브 속에서 회사를 키운 재벌들에게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감추고 싶은 스토리가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도입하던 초기에는 규정과 제도를 이상적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규제를 제대로 엄격히 적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느 회사도 경영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규제였습니다. 더구나 새로운 사업에 재투자할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그 당시 집권 여당의 재정 담당 정치가,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았던 부총리 등이 최고 권력자에게 읍소하여 건전한 재투자를 위한 비자금 조성에 대하여서는 눈 감아 주었습니다.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 속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사업확장을 위한 재원 마련이 쉽지 않아 비자금을 일부 용인한 것입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하였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예측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당시의 기업들이 오늘의 경제를 일으키는 밑거름이 되었었다는 사실조차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요즈음에도 국내 대기업의 총수가 걸핏하면 감옥에 갇히고 기업들이 수사선상에 올라 세무조사를 받고,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습니다. 조사를 받고 그 결과 처벌을 받는 기업들이 법과 규정을 어겼으면 당연히 처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시각과 그들의 편의를 위한 무리한 법 적용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재벌들의 도덕성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의 법과 규정, 제도를 제대로 지켜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재벌들이 도덕적으로 우수한 집단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1970년대처럼 지키지도 못할 규정과 제도를 의욕만 앞세워 무리하게 제정하여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감안한 규정과 제도를 만들고 이를 엄격히 적용하여야 합니다. 지ㅣ지 못할 규제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편법과 정경유착의 단초가 됩니다. 위정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재벌들에게는 지키지 못할 규정을 위반한 것에 대한 처벌을 하고, 위정자의 마음에 드는 재벌들은 눈 감아 주는 식의 행태는 더 이상 없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