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하네다 공항- 2018. 1. 5.

jaykim1953 2018. 1. 5. 03:34


지난 주 목요일에 저는 일본 동경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하여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김포 공항과 하네다 공항은 한 때 한국과 일본의 수도(首都)로 연결되는 관문 역할을 하던 주요 공항들이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김포공항은 2002년 인천 공항이 문을 열면서 서울의 관문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네다 공항은 이미 40년 전에 나리타 공항이 개항하면서 지역 공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김포공항은 극장, 쇼핑 몰 등이 들어서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비즈니스의 돌파구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저도 이따금은 이런저런 일로 김포공항에 들립니다.그 곳 식당가에서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지난 주 오래간 만에 가보게 된 하네다 공항에서는 새로운 감회를 느꼈습니다. 일본으로 여행을 할 때면 몇 번 들려 보기는 하였으나 제게는 하네다 공항과는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처음 일본으로 출장을 갔던 1981년에도 이미 나리타 공항이 동경의 주공항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저도 나리타 공항으로 입국하였습니다.하네다 공항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은 아마도 40년 이상 전에 일본에 다니시던 분들일 것입니다. 그만큼 연세도 적지 않게 드신 분들께서 하네다 공항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곰곰이 하네다 공항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제가 중학생이었던 1960년대 후반의 일입니다. 그 때 저보다 나이가 10년 위인 제 이종사촌 형님 한 분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형님이 타고 갔던 비행기는 일본 하네다 공항을 경유하여 그 곳에서 3~4시간 머무르다가 비행기를 갈아 타고 가야 했습니다. 그 때 그 형님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해외 여행 경험도 많은 친척분이 그 형님에게 공항에서의 주의사항, 입출국 절차 등에 대한 설명을 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네다 공항에 3~4 시간 머무르면서 공항도 좀 둘러보고, 식당에 들러서 일본 우동도 사 먹도록 해라 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 이종사촌 형님은 공항이 다 똑같겠죠 뭐, 김포 공항 봤으면 됐지 하네다 공항을 또 볼 필요 있나요?’ 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척분은, ‘야 세상은 서울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크단다. 하네다 공항에 비하면 김포공항이 공항이냐? 가보면 알게 될 꺼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해외라고는 제주도조차 가보지 못하였던 저는 그 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가보았던 그 당시의 김포공항은 큰 건물과 길고 널찍한 활주로 등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포공항은 공항도 아니라는 것입니다.저는 속으로 하네다 공항은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이렇게 큰 김포공항은 공항도 아니라고 할까?’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960년대말의 김포공항은 하루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숫자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한가한 공항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김포공항에 전화를 걸어 오늘 미국에서 들어오는 비행기는 몇 시에 도착하나요?’ 라고 물으면 ~ 00  00분에 도착합니다.’ 라고 답할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취항하던 노스 웨스트 (North West Airline), TWA (Trans World Airways)등은 일주일에 2~3 번 김포공항에 들어 왔었습니다. 그때에 하네다 공항에서는 이미 하루에도 수 십 편의 비행기가 미국의 여러 곳- 주로 서부지역-에서 도착하고 또 출발하였습니다.


문득 우리나라가 그 동안 엄청난 성장을 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인천공항에 가보면 출발편과 도착편이 두 스크린에 분리되어서 빼곡히 정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크린에 보이는 것들은 그 시간대에 출도착편들만 나온 것이고 하루 종일 드나드는 비행기의 숫자는 수백 편이 넘을 것입니다. 지난 20~30년 동안의 변화는 그야 말로 일취월장(日就月將) 눈부신 발전이었습니다. 그러니 50 여 년 전과 비교한다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을 것이며 그 당시 예전의 모습은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1966년의 일을 한 가지 기억해 보겠습니다. 1966 2월 제가 초등학교 (그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저축을 장려하여 통장을 개설하고 매달 조금씩 저금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 저축된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받은 돈은 약 5천 원 정도였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학교 다니던 초등학교 3학년 때에는 버스 요금이 2원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버스요금은 입석 버스는 5원 좌석버스는 10원이었습니다. 그러니 5천 원이라는 돈이 중학생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제가 그 만한 돈을 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저희 선친께서 제가 시험에 100 점을 받으면 100, 반에서 1등을 하면 100, 이런 식으로 소위 인센티브를 주셨기 때문에 그런 큰 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저는 5천원을 들고 그 당시 제일은행 본점-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옆 SC 은행 중앙지점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창구 직원에게 이자가 제일 많이 나오는 상품에 맡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정확한 이자율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창구 직원은 신탁을 권하였고 10년 만기를 권하였습니다. 10년까지는 고정 이자율이고 그 이상 만기 상품은 고정 이자율이 아니라서 이자율이 변동하면 만기에 찾을 금액이 얼마가 되는지 알 수 없다는 설명도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자는 복리로 지급한다고 하였고, 복리라는 단어를 이해 못하는 제게 이자에 또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직원이 권하는 상품에 제 돈을 맡겼습니다.


제가 그 돈을 찾게 된 것은 1976년 제가 군인이었을 때입니다.  3만 원에 가까운 돈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 때 제가 받고 있던 육군 병장의 월급은 500 원이었고, 3, 6, 9, 12월이면 100% 보너스가 나와서 1,000원을 받았습니다. 연봉(?)으로 치면 8,000 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제 기억으로는 제가 받은 신탁 원리금 합계가 육군 병장1 년치 월급의 3 배가 넘고 거의 4배에 육박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 때의 물가는, 명동의 생맥주 집에서 친구와 둘이 생맥주 1,000 cc 한 잔씩하고, 마른 안주 하나를 시키면 1,200~1,300 원이 들었습니다. 제가 군을 제대한 것은 1977 4월이었고 그 때에는 이미 저의 초등하교 때 저금을 종잣돈으로 한 저금은 야금야금 빼어 쓰면서 모두 바닥이 난 다음이었습니다. 제가 10년이나 맡겨 두었던 저의 예금은 그래도 저의 군대 생활의 후반부를 윤택하게 해주는 용돈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제대하고 군복무 기간 동안 휴학하였던 학업에 돌아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금융권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높을 때에는 예금 이자가 웬만큼 높아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우리나라 인플레이션은 정부 발표에 따르면 연 평균 15~20 %였고, 실제 국민들이 체감하는 물가상승률은 30%에 육박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자율 10~15% 정도로는 도저히 인플레이션을 보상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고율의 인플레이션 아래에서는 오히려 실물에 투자하여 물가 상승의 혜택을 기대하는 것이 좋았던 시절입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을 사서 10년이 지나면 어렵지 않게 6~7 배 가격이 오르고 조금만 지역을 잘 골랐다면 10배 이상의 가격 상승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저는 5천원을 신탁 예금에 맡겨 10년 후에 제 군대 용돈으로 날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일찍이 투자에 눈을 떴더라면 그 돈으로 부동산을 샀었어야 하였을 것입니다.


한 가지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제가 군생활을 하였던 장지동 지역은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아파트와 상가가 즐비합니다만, 제가 군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주변이 거의 모두 논이었습니다. 논 한 평에 그 당시에 500 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그 당시로서는 매우 비싼 가격이라고들 하였습니다. 저와 함께 군대 생활을 하던 동료들은 웃으면서 병장 월급으로 매달 논 한 평씩 사자고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농담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때 실제로 매달 논을 한 평씩만 사 두었더라면 지금은 그 땅 값이 수 천만 원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초저금리 시대입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도 금리 못지 않게 매우 낮은 상태입니다. 이럴 때에는 예금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다시 초고율의 인플레이션 시대가 돌아온다면 그 때에는 다시 예금을 깨서 실물에 투자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인플레이션이 다시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그러나 당분간은 인플레이션이 다시 가속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는 합니다. 아직은 실물보다는 예금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