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2인자- 2018. 4. 6.

jaykim1953 2018. 4. 6. 20:27

 

미국의 프로 포켓 볼 당구(pool) 선수 가운데 자넷 리 (Jeanette Lee)라는 한국계 선수가 있습니다. 한국 이름은 이진희이고 1971년생이니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 만 47세를 바라봅니다. 그녀의 별명은 Black Widow(검은 미망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녀가 검은 옷을 즐겨 입었고, 경기 내내 무표정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어서 붙여진 별명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녀의 경기를 TV로 여러 번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주말이면 여러 스포츠 중계 가운데 포켓볼 당구도 심심치 않게 방영하여 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우승에 다다르기 위하여서는 항상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의 숙적이자 훌륭한 경쟁상대이며 라이벌인 앨리슨 피셔 (Alison Fisher)선수입니다. 앨리슨 피셔 선수는 영국의 잉글랜드 지방 출신으로 자넷 리 선수보다 2살 더 많으며 세계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하였습니다. 자넷 리 선수도 적지 않은 우승 경력이 있으나 우승 횟수에서는 앨리슨 피셔 선수가 자넷 리 선수를 앞지르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넷 리 선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앨리슨 피셔 선수와 겹치게 됩니다. 만약 자넷 리 선수가 활약하던 시기에 앨리슨 피셔 선수가 없었더라면 자넷 리 선수는 거의 천하를 혼자 평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앨리슨 피셔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앨리슨 피셔 선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자넷 리 선수가 없었다면 그 녀의 우승횟수는 더 늘어났을 것입니다.

얼마 전 지금은 은퇴한 미국 LPGA 프로 골퍼 박지은 (미국명 그레이스 팍; Grace Park) 프로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소개하며 ‘저는 LPGA에서 6 승 밖에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문득 대중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상 LPGA 경기에서 한 번의 우승도 쉽지 않습니다. 수 많은 골퍼들이 우승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프로 골퍼 생활을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지은 선수는 1999년 그녀가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아마추어 시절에 수 많은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고 각종 수상식에서 최우수상을 휩쓸었던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는 달랐습니다. 박지은 선수가 프로로 전향할 때쯤에는 우리나라의 박세리 프로, 김미현 프로가 미국 LPGA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상위 랭커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주의 캐리 웹 (Karrie Webb)도 그녀의 절정의 기량을 보이고 있었고, 수 많은 쟁쟁한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골프의 여제(女帝)라는 아니카 소렌스탐 (Anika Sorenstam)의 전성기 시절입니다. 아니카 소렌스탐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여자 골프계를 평정하던 훌륭한 선수입니다. 그녀로 인하여 많은 선수들이 우승의 기회를 놓쳤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카 소렌스탐 선수의 출현도 조금은 드라마틱하였습니다. 1995년 여름 미국 US Women’s open에서 우승하면서 혜성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녀의 우승 경력은 있었지만 미국 LPGA에서, 그 것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니카 소렌스탐이 첫 우승을 한 1995년도 US Women’s open 에 박지은 선수도 아마추어 자격으로 참가하였었다고 합니다.

미국 농구 선수 가운데 패트릭 유잉 (Patrick Ewing)이라는 쎈터가 있습니다. 뉴욕의 닉스 (Knicks)소속으로 대부분의 선수생활을 하였고 신장이 213쎈티 미터나 되는 장신의 거구입니다. 그러면서도 몸이 느리지 않고 뛰어난 실력으로 최고의 쎈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마지막 2 시즌은 뉴욕 닉스를 떠나 있었지만 그는 15시즌을 뉴욕 닉스 소속으로 맹활약을 하였고 NBA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 되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선수라고 칭송을 받았지만 NBA 우승은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전성기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의 전성기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패트릭 유잉은 1962년 8월생이고 마이클 조던은 1963년 2월생입니다. 패트릭 유잉은 마이클 조던과 함께 1992년 농구 드림 팀에서도 함께 뛰었습니다. 마이클 조던과 함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그로 인하여 드림팀의 일원으로 농구 명예의 전당에 또 한 번 헌액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마이클 조던이 쓰리핏 (Threepeat- 우승을 연달아 하는 되풀이가 repeat이라면 세번 연거푸 하는 것은 threepeat이라고 붙인 별명)을 두 번이나 하는 것을 패트릭 유잉은 바라보기만 하여야 했습니다. (1991~1993 & 1996~1998, 2 회)

저도 우연히 패트릭 유잉을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10 여 년 전, 뉴욕의 어느 자동차 딜러 사무실에서 자동차 판매원과 상담을 마치고 일어서서 돌아서는 순간 저의 앞에 무언가 커다란 벽이 턱 가로막혀 있는 듯하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장벽 같이 커다란 사람이 떠억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얼굴이 조금 낯 익은 듯 한 것입니다. 움찔 놀라서 제가 옆으로 한 발자국 비키자, 그도 공손히 옆으로 비켜 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야 그의 얼굴을 알아 보았습니다. 패트릭 유잉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 월에는 미국에서 TV로 대학 농구 중계를 보고 있으니 패트릭 유잉이 자신의 모교인 조지 타운 대학의 헤드 코치(감독)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하여 정상에 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박지은 선수가 아마추어 시절에는 천하를 평정하였어도 프로로 전향하여서는 수 많은 강자들 틈에서 정상에 6 차례 오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습니다. 자넷 리 선수도 앨리슨 피셔 선수가 아니었다면 천하를 호령하며 거의 모든 타이틀을 혼자서 독식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농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단체 경기이기는 하지만, 패트릭 유잉도 마이클 조단과 다른 시기에 활동하였다면 우승의 기회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금융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1 등만이 기억되고 살아 남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국내 대기업들의 해외 채권, 주식 예탁증서(DR: Depositary Receipt) 등의 발행이 활발하던 시기였습니다. 작게는 1천 만 달러부터 크게는 5천만 달러까지 다양한 금액의 해외 증권이 발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발행 주간사는 모두 외국 증권사가 독점하였습니다. 국내 증권사는 해외에서 이 정도 규모의 증권조차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하였고, 주간사 업무를 수행할 만한 인력이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주간사 업무는 모두 외국 증권사에게 넘겨 주고 국내 증권사는 인수단에 소액 규모로 인수단 리스트의 끄트머리에 참여하는 수준에서 만족하여야 했습니다. 그 시절의 국내 증권사들은 해외에서 큰 규모의 증권 매매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현지 브로커를 고용하여 현지 투자자와의 거래를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이 발행된 증권을 대규모로 매각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국내 기업들의 해외 발행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국내 영업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소액이지만 신규 발행 증권을 인수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수한 증권을 투자자에게 되파는 것은 포기하고 자신의 자금으로 매입하였습니다.

90년대 초 국내 대기업의 해외 발행 주간사를 맡아서 로드 쇼를 위하여 제가 영국 London을 방문하였을 때입니다. 그 당시 저보다 6년 선배인 L씨는 마침 KEB International London (KEBI London)이라는 외환은행의 영국 현지 법인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L씨는 제게 부탁하여 발행 DR 가운데에서 10만 달러 어치를 매입하였습니다. KEBI London은 다행히 현지에 주재하였던 L씨가 저와 인연이 있어 비교적 어렵지 않게 10만 달러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증권사들은 저와 연이 닿지 않아 애를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연줄을 통하고 인맥을 동원하여 저와 손이 닿기를 원하는 증권사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는 한결 같이 큰 금액은 아니고 10~30 만 달러 규모의 인수단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간사의 입장에서는 소액으로 여러 증권사가 인수단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 증권사들이 필사적으로 인수단에 참여하려 하였습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 영국 런던에 지점 또는 현지법인을 세운다고 하였지만 현실은 주류 금융과는 거리가 있는 국내 증권사들끼리의 도토리 키재기식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당초 1 등의 자리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마이너 리그의 하위 랭크에 쳐져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에 인수단에 참여하려고 애를 쓰던 증권사들 가운데 아직도 영국에 지점 또는 현지 법인을 유지하고 있는 증권사는 많지 않습니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 정상의 위치에 우뚝 선 우리나라 선수도 많습니다. 그리고 비록 세계 무대를 완전히 평정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자넷 리, 박지은 등 세계 정상의 무대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많습니다. 스포츠 분야뿐 아니라 금융계에서도 세계 최고의 금융기관과 어깨를 겨루는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이 언젠가는 나타나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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