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새나라 자동차- 2019. 3. 15.

jaykim1953 2019. 3. 15. 17:05



예전에 우리나라에 새나라 자동차라고 불리는 차가 있었습니다. 5.16 군사혁명 이듬해인 1962년에 일본에서 수입해 들여온 자동차입니다. 닛산(Nissan, 日産) 자동차가 만든 블루버드(Bluebird)를 세미 넉 다운 (Semi-Knock down)방식으로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하여 판매하는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그 당시 군사 혁명 정권이 정부를 대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군부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하여 아시아 영화제를 우리나라에서 주최하였습니다.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세종문화회관이 있던 자리에 시민회관이 있었고 그 곳에서 아시아 영화제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길거리에 변변한 택시를 찾아 보기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고작 시발 택시가 택시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시발 차는 엔진만 우리나라에서 주물을 부어 제작하였을 뿐 변속기 기어, 구동장치 및 거의 모든 부품을 미군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지프 차의 중고 부품을 이용하여 만들었던 차량입니다. 그리고 차량의 바디는 드럼통을 두들겨 펴서 용접으로 이어 붙여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관부터 조악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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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자동차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55년이었고 그 해에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차는 1963년에 생산을 중단합니다. 바로 새나라 자동차가 등장한 다음 해입니다. 새나라 자동차는 성능은 물론 외관부터 시발 자동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자동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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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정권은 아시아 영화제와 때를 맞추어 국내 택시로 사용할 목적으로 새나라 자동차를 들여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국내 기술이 부족하여 세미 넉 다운 형태로 들여온 차량을 제대로 조립하지 못할 우려와 아시아 영화제 시일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도입 물량의 반 이상을 완제품 형태로 들여왔었습니다.

그리고 새나라 자동차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택시 미터기를 달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택시를 잡으면 승차하기 전에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택시 값을 흥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미터기를 장착한 새나라 택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택시를 잡고 승차하면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꺾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미터기에 표시된 요금을 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요금은 30원으로 2 킬로미터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500 미터마다 5 원씩 요금이 올라 갔습니다. 그 당시 버스 요금이 5 원이었고, 합승 (소형 마이크로 버스 형태의 좌석 버스) 요금이 10원이었습니다.

택시 미터기는 지금의 디지털이 아닌 기계식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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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는 빈 차라고 씌어 있으나, 초기의 미터기는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을 들여오면서 한자(漢字) 空車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손님이 타서 미터기를 꺾으면 미터기 오른쪽 윗칸에 한자로 賃走라는 표시가 나왔습니다. ‘賃走 임대(賃貸)하여 주행(走行)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미터기조차도 국내에서 생산이 안 되어서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수입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복기(復碁)해 보면, 군부 정권이 그들의 통치가 국민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있고 국내 정세가 안정되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아시아 영화제라는 행사를 주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행사를 원만히 치르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으로부터 완제품 자동차 수 천대를 수입하여 택시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택시 미터기도 함께 도입하였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택시는 미터기를 장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택시 미터기가 도입된 계기는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1962년의 아시아 영화제였습니다.

조금 경우가 다르기는 합니다만, 1980년에 집권한 신군부 정권도 정권의 정통성을 대외에 알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국제 행사를 기획하였습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게임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하여 기치를 올렸으나, 행사가 계획만 되어 있을 뿐 막상 실제로 열리는 것은 없었습니다. 1980년도에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유치하여 진행하기는 하였으니 같은 해에 일어났던 광주 사태의 직후에 행사가 열려서 조금은 졸속 진행의 느낌마저 들었고, 분위기를 크게 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1985년 서울에서 대단한 세계적인 행사가 열렸습니다. 국제통화기금 (IMF) - 세계은행 (IBRD) 연차총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IMF-IBRD 연차 총회는 경제, 금융의 올림픽이라 불릴 만큼 전세계 각국의 재무장관, 중앙은행장이 모두 참가하는 큰 규모의 행사입니다. 이를 서울에 유치하는 데에 성공하여 그 해 10월에 서울 남산에 있는 힐튼 호텔을 주회의장으로 사용하면서 서울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호텔이 세계 각국의 재무장관, 중앙은행장 일행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세계 금융의 이목이 서울에 집중되었던 1985년에 우리나라 금융에 커다란 역사의 발자취가 또 한 가지 남게 됩니다. 바로 국내 기업 가운데 삼성전자주식회사가 최초로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 달러화로 표시된 전환사채(CB, Convertible Bond)를 발행하였습니다. 15년 만기에 금리는 연() 5%로 발행금액은 2천만 달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985년 발행된 첫 해외 CB는 그 전해인 1984년 코리아 펀드의 뉴욕 상장과 함께 초기 우리나라 금융의 국제화에 커다란 족적으로 남을 사건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군사정변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정권의 정통성, 정당성을 강변하려는 움직임으로 국제행사를 유치하고, 그에 즈음하여 사회, 경제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던 점에서는 위의 두 가지 사례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초기의 우리나라 경제는 발전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경제발전의 열매가 맺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보다 자연스럽고 순조로운 경제의 발전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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