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Freddie.... - 2019. 4. 19.

jaykim1953 2019. 4. 19. 20:26


지난 해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인기를 누렸던 영화가 있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 였습니다. (Bohemian Rhapsody_trailer) 이 영화는 퀸 (Queen)이라는 음악 밴드의 리더이자 대단한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인생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지난 2월의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아깝게 작품상은 놓쳤으나 남우주연상을 비롯한 4개 분야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사실 프레디 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프레디 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프레디 리틀 (Freddie Little, 프레디 리틀프로파일)이라는 복서- 권투선수입니다. 이 이름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꼭 나오는 우리나라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선수입니다.

김기수 선수는 1966 6 25일 서울의 장충체육관에서 당시 주니어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Nino Benvenuti) 선수와 타이틀 매치를 벌여 판정으로 벤벤누티 선수를 누르고 세계 챔피언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당시까지는 벤베누티 선수는 무패를 자랑하는 세계 챔피언이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김기수 선수를 판정으로 눌러 이겼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기수 선수와 경기를 벌이기 바로 1년 전에 그 때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같은 이탈리아 선수인 산드로 마징기 (Sandro Mazzinghi) 선수와 경기에서 6회에 KO로 경기를 마치면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산드로 마징기 선수와 니노 벤베누티 선수는 같은 해 12월에 리턴 매치를 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챔피언이 타이틀을 잃을 때에는 리턴 매치를 옵션으로 계약하는 일이 많았고, 산드로 마징기 선수가 이 옵션을 행사하여 리턴 매치를 벌였으나 다시 15라운드 판정으로 산드로 마징기 선수가 패하고 맙니다. 니노 벤베누티 선수는 챔피언타이틀을 차지한 지 1 년 만에 타이틀을 김기수 선수에게 빼앗깁니다. 그리고 김기수 선수도 세계 타이틀을 차지한 지 2년 만에 챔피언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데 이 때 김기수 선수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아 간 선수가 아이러니컬 하게도 바로 산드로 마징기 선수입니다. 그리고 김기수 선수와 산드로 마징기 선수의 타이틀 매치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벌어졌습니다.

김기수와 니노 벤베누티, 산드로 마징기- 이렇게 세 선수 사이에는 물고 물리는 관계가 성립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또 한 선수가 끼어들게 됩니다. 바로 프레디 리틀 선수입니다. 김기수 선수가 세계 챔피언 자리에 있으면서 두 번의 타이틀 방어전에 성공하는데 바로 두 번째 타이틀 매치의 상대가 프레디 리틀 선수였습니다. 기록을 찾아 보면 1967 10월에 당시의 서울 운동장 야구장 (후에 동대문 구장이라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들어섰습니다.) 옥외 특설 링에서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 날의 경기는 김기수 선수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기였을 것입니다. 다운을 한 차례 빼앗기고 졸전을 벌이다가 가까스로 판정으로 이기기는 하였으나 국내 복싱 팬과 언론들마저 편파 판정이라고 등을 돌렸습니다. (관련기사: 유례 없는 불공평) 그 당시만 하여도 복싱 경기에는 세 사람의 심판 가운데 자국인이 두 사람이다 보니 소위 홈 디시젼 (home decision)이라 불리는 편파 판정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김기수 선수가 세계 타이틀을 차지하기 불과 6개월 여 전에 필리핀에서 있었던 우리나라 선수 최초의 세계 타이틀 매치였던 주니어 플라이급의 서강일 선수 경기도 편파 판정으로 인하여 패하였다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였습니다. (금요 모닝커피 2014. 2. 7. 참조) 그러니 우리도 당한 만큼 갚아 준다는 일종의 보복심리도 작용하였을 수도 있으나, 공정하여야 한다는 스포츠 정신에서 본다면 그리 떳떳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었던 경기였습니다. 프레디 리틀 선수는 세계 권투 연맹 (WBA- World Boxing Association)에 항의(appeal)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김기수 선수에게 패하였던 프레디 리틀 선수는 다시 1년 후에 산드로 마징기 선수와 세계 타이틀 매치를 벌여 챔피언에 도전하게 됩니다. 이 당시 기록에 의하면 프레티 리틀 선수는 챔피언인 산드로 마징기 선수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쳐 압도적으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고, 산드로 마징기 선수의 두 눈이 모두 찢어져 도저히 경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정상적인 경기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으로 인하여 경기가 중단되면 그 때까지의 채점을 바탕으로 TKO- Technical Knock-Out 판결을 내려야 하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이 경기는 무판정 (No Decision) 경기가 되고 맙니다. 이 경기는 이탈리아에서 벌어졌으니 프레디 리틀 선수는 또 한 번의 홈 디시젼에 고개를 떨구어야 했습니다. 프레디 리틀 선수는 세계 권투 연맹에 다시 한 번 강력히 항의하였고, 이번에는 규정을 잘 못 적용하였다는 판결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래서 재경기를 하게 되었으나 이 번에는 산드로 마징기 선수가 프레디 리틀 선수와의 경기를 피하였습니다. 그 결과 산드로 마징기 선수는 타이틀을 박탈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공석이 된 세계 챔피언 자리를 놓고 시합을 벌여 프레디 리틀 선수는 1969년에 드디어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약 1년 후 다시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선수에게 타이틀을 잃습니다. 그리고 1972년 복싱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합니다.

프레디 리틀 선수는 프로 권투 선수 생활을 마치고는 한 때 라스베가스에서 중학교 체육 선생님으로 일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936년 생입니다. 이제는 그의 나이도 만 83세입니다. 그의 일생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단편적으로 접하게 된 그의 복싱 경력은 그가 가지고 있는 권투 실력보다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산드로 마징기 선수와의 경기에서 규칙을 제대로 적용하였더라면 그는 조금 더 일찍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김기수 선수와의 경기 판정이 좀 더 공정하였더라면 그는 훨씬 더 일찍이 세계 챔피언이 되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금융기관 가운데에도 불운한 은행이 있었습니다. 한국 개발 금융 공사에서 분리 발전하여 한국 투자 금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79년 장기신용은행법이 생기면서 이름을 한국장기신용은행이라고 고친 은행입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3. 1. 18. 참조) 자기자본의 20배까지 채권(장기신용채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법으로 허용되었던 은행입니다. 한 동안 장기 금융의 원천으로 주목 받았으나, 그 당시만 하여도 장기 금융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하여 경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장기 신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당시의 경영진들은 자회사로 증권 회사를 만들어 증권 브로커 비즈니스를 하였고, 신용카드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신용카드는 전형적인 1~2 개월 만기의 단기 금융상품임에도 장기신용은행이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나라 산업에는 장기 금융이 필요합니다. 장기신용 은행이 국민은행에 합병되었던 1998년의 IMF 사태 당시만 하여도 제대로 된 장기 금융이 공급되지 않았던 것이 사태의 빌미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보철강의 공장 건설에 장기 금융이 아닌 단기 운전자금 대출로 재원을 조달하는 등 제대로 된 장기 금융의 수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장기신용은행이 제대로 역할을 하였더라면 훌륭한 장기 여신 금융기관으로 살아남아 지금도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장기 여신 시장도 그 동안 시장 상황뿐 아니라 기업과 관련 금융기관의 이해 부족, 경영진의 단견(短見) 등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나마 장기신용은행이라는 장기 여신 전문기관도 이제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에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러한 금융기관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의 불운을 딛고 이제는 좀 더 원칙에 충실하고 기초가 탄탄한 금융시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