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자유분방 (自由奔放)- 2019. 9. 11.

jaykim1953 2019. 9. 12. 11:43



지금으로부터 51 전인 1968 12월의 일입니다.  당시에 경북 영주 지역에 북한의 무장공비가 출현하였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장공비들은 산속을 누비며 북으로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우리 군부대의 소탕작전을 견뎌내지 못하고 대부분 몰살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 남은 생존자는 자수하였습니다. (관련기사: 경향신문_1968/12/14_자수공비 조응택) 그가 자수하고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교적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회견 끝마무리에 자신이 북에서 듣고 배운 남한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목은 대머리 총각 이었습니다. (youtube.com_대머리 총각_김상희)

요즈음의 탈북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래 남한의 TV 방송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입수하여 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가 전세계적으로 K팝이라는 이름으로 퍼져 나가는 마당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문화에 스며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가 노래뿐 아니라 스포즈, 방송  여러 분야에서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음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얼마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포맷의 연예 프로그램인 복면가왕이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관련기사: chosun.com_2019/08/26_미국판 복면가왕) 우리나라의 야구선수가 본고장 미국에서 웬만큼 활약하는 정도로는 이제 커다란 뉴스거리가 아닙니다. 1980  박철순 선수가 미국의 프로야구 더블 에이 팀에 입단하는 것이 크게 보도되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됩니다. (관련기사: 동아일보_1980/1/29_박철순 미국프로야구 월봉 700 달러)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문화적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데에는 외국 문화의 유입을 허용한 것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문화를 수입 개방한 것은 1998년이 시작이었습니다. (관련기사: 매경_1998/12/26_일본문화개)  때만 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의 문화시장은 왜색(倭色) 물든 시장이 되고  것이라는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밖에도 일본 문화의 수입은 적정선에 머물렀고 우리의 문화도 적지 않게 일본으로 수출되었습니다. 2002 TV 드라마 겨울연가 일본에서 크게 히트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우리의 문화가 일본에 수출되는 물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만약 우리가 일본과의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겨울연가 일본으로 수출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후로 이어지는  많은 한류 드라마들이 일본으로 소개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비단 문화뿐 아니라 많은 분야가 그러합니다. 우리나라가 외제 자동차를 수입하여 판매를 허가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말입니다. 처음에는 외제차를 사서 타고 다니는 것이 눈치가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외제 고급 승용차와 견줄 만한 품질의 자동차가 없었습니다. 고작 2000 cc  중형차를 만들어 팔면서, 그나마도 외국 모델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조립하는 것이  이상이 되던 때입니다. 처음으로 고급차량을 제작한다고 하면서 3000 cc  차량을 제작하여 판매하였으나,  차들은 모두 외국 모델을 수입하여 조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조금씩 고급 모델의 차량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의 경영진과 노동자들도 고급 차량의 제작에 눈을 뜨고 손에 익히기 시작하면서 점차 고급 자동차의 설계, 제작에 나서게 되었고, 지금은 상당한 수준의 고급 자동차를 생산하여 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을 개방하는 것을 주저하고, 국내 자동차 산업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외국 자동차의 국내 진입을 막았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아직도 조악한 품질의 저가 자동차 조립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 제조업 분야에서는 과감한 시장 개방으로 외국의 경쟁 상대와 어깨를 나란히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지 아쉬운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금융 분야입니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아직도 우리들만의 리그(league)라고 불릴 만한 수준입니다. 자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만드는 규정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외국에 비하여  없이 높은 각종 세금과 규제도 비일비재합니다. 1980년대, 1990년대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직도 미흡한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을 옥죄는 규제와 감시를 맡고 있는 금융당국과 정책 당국은 금융시장의 개방과 동시에 국부(國富) 해외 유출이 우려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이 전세계의 금융기관들과 경쟁하여 우리나라 금융시장을 지켜낼 만한 경쟁력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이 개방될 때에,  일본의 문화가 개방될 때에 보였던 정부 당국자의 우려는 지금의 금융시장 개방에 대한 우려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무언가 규제가 있고 감시가 있어야만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에서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을 보호하고 외국 금융기관의 횡포로부터 시장을 보호할  있다고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생각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한다면 우리나라의 감독기관들이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보다 금융관련 지식이나 아이디어가 낫다고   있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개방된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라고 하면   살아 남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경쟁과 창의력으로 성장하고 생존해 가는 곳입니다. 금융시장은 자본주의 경제의 꽃이라   있는 곳입니다. 외국의 사모펀드(private equity) 규제를 피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 펀드입니다. 우리나라의 사모펀드는 정부의 정책당국과 감독당국이 협의하여 만든 규정에 의하여 규정에 맞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처음 탄생부터가 다릅니다. 자유롭게 태어난 외국의 사모 펀드와 국내 규정의 틀에 맞추어 태어난 우리나라 사모펀드의 창의적 성장 능력은 처음부터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어느 노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해주신 말씀입니다.

세계  2 대전 당시에 일본군은 오와 열을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행진하고 군기가 바짝 들어 보였고, 미군은 줄도   맞추고 자유분방하고 복장도 단정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는 미군이 이겼다. 국가간의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사회가 틀에 박혀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를 이긴 것이다.”

정책 당국자나 감독당국의 시각으로는 정해진 틀에  맞추어 주어진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그런 금융 시장이 보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금융시장은 발전이 없고, 작은 충격에도 모두 무너져 내립니다.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리스크에 대한 적응이 불가능합니다. 금융시장은 리스크에 대한 대비와 창의력으로 살아남는 시장입니다.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도 보다  자유분방한 사고로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금융활동을   있는 날이 오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것이고,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가지 사족을 달자면…. 1968 겨울 자수한 북한군 무장공비가 남한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동경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대머리 총각 기자회견에서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로부터 4   대통령이 작사 작곡한 새마을 노래가 매일 아침 스피커를 통하여 전국에 울려 퍼지는 획일성이 우리나라의 문화 깊숙한 바닥에 남아 있었습니다. (관련기사:  동아일보_1972/3/16_새마을 노래 전국보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