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2017-2019

가네다 마사이치- 2019. 10. 11.

jaykim1953 2019. 10. 11. 17:54

지난 월요일 아침 인터넷 뉴스에는 뜻 하지 않은 비보가 있었습니다. 한국계 재일동포로서 일본 프로 야구계의 레전드인 가네다 마사이치(金田 正一, 한국명 김경홍)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였습니다. (관련기사: yna.co.kr_2019/10/6_가네다 마사이치 별세)

그는 비록 일본인으로 국적을 바꾸었으나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통산 400승은 일본뿐 아니라 세계 야구사(野球史)에서 흔치 않은 기록입니다. 미국의 역사적인 최고의 투구 사이 영 (Cy Young, 주: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한 해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사이 영 상의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511 승에 뒤이어 세계 3 번째로 많은 승리를 기록한 선수입니다. (2위는 417 승의 미국 선수인 월터 존슨- Walter Johnson)

가네다 마사이치 선수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1962년 우리나라는 뜻하지 않게 외국 프로야구팀이 많이 방문하였습니다. 10월에 미국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Detroit Tigers)팀이 내한 하였고 (금요일 모닝커피 2013. 6. 14. 참조) 그 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11월 초에 일본의 도에이 플라이어즈 (東映 Flyers)와 고구데츠 스왈로우즈 (國鐵 Swallows) 두 팀이 방문하였습니다. 두 팀의 특징은 모두 한국계 수퍼스타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도에이 플라이어즈에는 장훈 (張勳, 일본 명 張本 勳 - 하리모토 이사오) 선수가 최고의 명성을 날리는 타자- 일명 '안타 제조기'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1 년 전 도일(渡日)하여 2군과 1 군을 오가며 일본 프로야구에 적응하고 있었던 백인천 선수가 있었습니다. 고구데츠 스왈로우즈에는 에이스 가네다 마사이치 선수가 한국계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일본 프로 아구 팀 가운데 한국계 선수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선수는 단연 장훈 선수와 가네다 마사이치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야구 팬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려진 이 들 두 팀을 초청하여 경기를 하였던 것입니다.

저도 이틀에 걸쳐 이 들 일본 프로 야구 팀의 경기를 구경하였습니다. 첫날에는 우리나라 대표팀과 도에이 플라이어즈, 그리고 이어서 도에이 플라이어즈 대 고구데츠 스왈로우즈의 두 경기가 있었고, 두 번째 날에는 우리 대표팀과 고구데츠 스왈로우즈, 그리고 고구데츠 스왈로우즈 대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두 경기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첫날에는 가네다 선수는 타석에는 들어섰으나 투수로 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둘 째 날에는 우리나라와의 경기에 선발로 나서서 강속구를 뿌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실업선발팀이었던 대표팀은 일본에서 건너온 두 프로 팀에게 모두 큰 점수차로 패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당시 백인천 선수는 일본에서는 주로 2군에서 뛰었으나 우리나라 방문 경기에는 첫날 우리 대표팀과의 경기와 둘째날 고구데츠와의 경기까지 2 경기에서 모두 포수로 출전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외야수로 포지션을 옮겼으나 일찌기 경동고등학교 시절부터 포수를 보았고 농협 입단 시절에도 포수였으며 우리나라 대표팀 최연소 포수로 선발되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지명 대타자 제도가 없었고 투수들도 모두 타석에 들어서던 시절이었습니다. (지명 대타자 제도는 1970년대 중반에 미국프로야구에서부터 도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하여도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는 선수는 거의 없었고 일본 프로 야구에서 뛰는 세 선수가 그래도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선수들이었습니다. 특히 장훈 선수는 한국 국적을 끝까지 유지하여 특별히 주목 받았습니다. 비단 외국인으로서의 불이익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까지 견뎌 내어야 하고 일상생활에도 외국인으로서의 지위가 많은 불편을 초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장훈 선수는 우리나라 야구 팬들에게 특별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가네다 선수를 무시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가네다 선수도 한국계 선수로서 일본 야구계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훌륭한 선수이고 우리나라 야구 팬들도 무척 좋아하는 선수였습니다. 한 때는 가네다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에서는 상대팀이 승리하는 것이 어려우니 전력을 기울여 경기하지 않고 가네다 선수가 등판하지 않는 경기는 반드시 이기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가네다 선수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20년의 야구 인생에서 400 승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네다 선수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남겨준 인상은 한국계 훌륭한 선수라는 정도입니다. 그의 승리 한 경기 한 경기를 우리나라 언론이 보도한 적도 없고 그의 근황을 자세히 보도한 적도 별로 없습니다.  당시에는 언론의 채널이 다양하지 않고 신문 지면도 하루에 4 면만을 발행하던 시절이었으니 소소한 외국 스포츠계의 많은 소식을 전하지도 못하였으며, 특히나 일본 국내 뉴스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포츠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스포츠를 통하여 국민들의 분위기를 바꾸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계 이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의 프로 레슬링이 있습니다. 패전국으로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혜성과 같이 역도산(力道山)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노란 머리에 온 몸에 털이 무성한 서양의 백인 거구들을 가라데 촙으로 두들겨서 쓰러뜨리고 통쾌한 승리를 합니다. 가뜩이나 서양인들에게 전쟁에서 졌다는 패배감 속에 있던 일본 국민은 이에 환호하였고 흥분하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IMF 구제금융 시절 미국의 여자 프로 골프 (LPGA) 무대에서 활동하던 박세리 선수가 맨발의 투혼으로 US 여자 오픈 경기에서 우승하였습니다. (관련기사: 박세리 우승 침체된 분위기 활력소_1998/7/6) 이 당시 실제로 많은 국민들이 분위기가 전환되는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당시 LA Dodgers의 투수 박찬호 선수와 박세리 선수의 승전보는 온 국민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스포츠 스타들은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복싱에는 김기수 선수, 홍수환 선수 등의 세계 챔피언이 있었고, 수영의 박태환 선수, 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가 있었으며, 한 때는 프로레슬링의 장영철 선수나 김일 선수가 덩치 큰 외국 선수를 때려 눕히는 통쾌함을 우리에게 선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수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힘들고 어려운 때에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였고 용기를 우러나게 해 주었습니다.

가네다 마사이치 선수는 비록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전성기 시절에는 일본과의 국교마저 제대로 맺어지지 않아서 일본과의 교류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야구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야구 팬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우상이었고 그를 바라보고 꿈을 키웠던 우리나라의 야구 선수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기록과 훌륭하였던 기량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처럼 훌륭한 스포츠 스타들이 계속 더 많이 나와서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