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프로 레슬러 천규덕- 2020. 6. 5.

jaykim1953 2020. 6. 5. 07:08

지난 화요일 오후 국내 언론에는 지나간 옛날의 향수를 아쉬워하게 만드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국내 프로 레슬링의 초창기 멤버였던 천규덕 선수가 8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관련기사: munhwa.com_2020/6/2_당수 달인 천규덕 별세)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장충초등학교 (당시의 국민학교)였습니다. 장충초등학교의 위치는 장충체육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저의 선친께서는 이따금 저를 데리고 장충제육관으로 프로 레슬링 경기를 보여 주러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당시 프로 레슬링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우리나라의 헤비급 챔피언은 장영철 선수 그리고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은 천규덕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심심치 않게 일본에서 프로 레슬러들을 초청하여서 국제 프로 레슬링 경기를 열곤 하였습니다. 물론 일본에서 오는 선수들은 일류급은 아닌 이류 정도 되는 한 수 아래의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프로 레슬러들이 일본 선수를 상대로 항상 이기는 경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관련기사: 경향신문 1964/2/6 한일 프로레슬링) 이 당시에 우리나라 헤비급 챔피언 장영철 선수에게 도전하여 번번이 혼나던 일본 선수의 이름은 ‘아라쿠마’ (荒熊) 였습니다. 이 선수는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일본의 주류 레슬링 부류에는 끼지 못하고 한 수 아래의 실력으로 지방의 중소 도시에서 경기를 펼치던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일본의 주류 레슬링 그룹은 역도산(力道山)을 중심으로 한 상당히 수준이 높은 실력의 레슬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의 일류 레슬러들과는 우리나라의 당시 레슬러들이 함께 어깨를 겨룰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였고, 대전료 또한 부담하기에는 벅찬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수 아래의 지방 중소도시 출신의 비주류 레슬러들을 불러다가 우리나라 선수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 레슬링의 일인자는 장영철 선수이고 이인자가 천규덕 선수였습니다. 천규덕 선수는 당수 5단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 보다 조금 후배인 홍무웅이라는 선수는 당수가 3단이라고 하였습니다. 홍무웅 선수는 이따금 링 위에서 벽돌을 손에 들고 수도로 쳐서 깨뜨리는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부 레슬러들은 별명도 지어서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백곰 우기환, 고릴라 이석윤, 거인 박송남 등은 그 당시 상당히 인기 있는 레슬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963년 말 일본 레슬링계를 이끌던 역도산이 갑자기 사망하고 나서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역도산의 제자들이 일본 레슬링계를 군웅할거(群雄割據) 하면서 자이안트 바바(馬場), 안토니오 이노키 등이 선두 주자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역도산이 아끼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일 선수도 일본 레슬링계에서 역도산의 뒤를 이을 선두 주자로 나서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일 선수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으나 역도산의 신원 보증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도산이 죽고 나서는 이제 김일 선수의 일본 체류에 대한 신원 보증인이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결국 김일 선수는 일본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치고 맙니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의 정부에서 전국민적인 성원을 받을 수 있는 스포츠 수퍼스타를 생각하면서 김일 선수에게 귀국을 제안합니다. 김일 선수도 일본 레슬링계의 경쟁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역도산이 가지고 있던 극동 헤비급 챔피언 (Far East Heavy Weight Champion) 이라는 타이틀의 흥행을 거머쥐고 귀국하게 됩니다. (관련기사: 동아일보 1965/7/1 오오키 긴따로 (김일) 귀국) 그 당시 누가 보아도 김일 선수는 한 수준 높은 기량의 선수였고 그가 극동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따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였습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며 우리나라 레슬링계의 일인자로 군림하던 장영철 선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쓸쓸히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관련기사: 동아일보 1965/11/29_ 주도권 쟁탈전 프로레슬링 난투극) 그를 따르는 후배들과 지방 도시를 전전하며 경기를 벌이면서 한 때의 우리나라 프로 레슬링 챔피언은 주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더구나 그는 ‘프로레슬링은 쇼다’ 라는 발언으로 누워서 침을 뱉고야 말았다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장영철 선수와 함께 우리나라 프로 레슬링계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던 천규덕 선수는 장영철 선수와 결별하고 김일 선수의 진영에서 함께 선수 생활을 이어 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나라 프로 레슬링계의 주류에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뒷날 그는 맨 손으로 황소를 때려 눕히는 퍼포먼스를 기획하였고 실행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황소는 당시 집권 여당이던 민주공화당의 상징인데 서슬 퍼런 집권당의 상징을 때려 잡겠다는 불손한(?) 의도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는 뒷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김일 선수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시나리오의 경기 운영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초반에는 대등한 경기로 시작하다가 상대방이 즉시 반칙과 비열한 공격으로 김일 선수를 어려움에 몰아 넣습니다. 상대의 거친 공격에 기진맥진한 김일 선수는 경기를 내주기 직전에 심기일전하여 마지막 힘을 다해 상대를 박치기로 쓰러뜨리고 경기를 마무리 짓습니다. 처음 몇 번은 이러한 경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흥미진진하였으나 계속 똑 같은 패턴의 경기가 이어지자 팬들은 조금씩 진부함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매번 얻어 맞기만 하고 상대의 반칙에 고전하다가 마지막에 박치기 한 번으로 끝나는 경기에 식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규덕 선수도 비슷한 과정을 따르게 됩니다. 상대방의 반칙과 비열한 경기 운영에 고전하다가 막판에 당수 춉(chop)으로 상대방을 제압하여 경기를 끝내는 것입니다. 김일 선수와 똑 같은 패턴을 따라 하는데 다만 무기가 김일 선수는 박치기이고, 천규덕 선수는 당수 춉이라는 것만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천규덕 선수는 상대적으로 인기를 크게 얻지 못하였고, 그의 전성기도 그리 길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가 처음부터 당수 춉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월등하게 우세한 경기를 펼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경기도 이따금 가졌더라면 그의 인기도 조금은 더 올라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몰아 부치고 우세한 경기를 하는 것도 이따금은 보여 줬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프로 레슬링뿐 아니라 많은 경쟁 속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습니다. 일방적으로 우세한 경쟁상대에게 끌려 다니다가 막판에 전세를 뒤집어 역전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처음부터 우세를 유지하면서 여유롭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 기업들이 5천만 달러 정도의 규모로 국제 금융시장에 나가서 증권을 발행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속해 있던 엥도수에즈 은행은 A 사의 해외 발행에 적극 참여하여 주간사 (Lead Manager)의 지위를 차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A사는 저희 은행뿐 아니라 몇몇 투자은행들을 상대로 경쟁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저는 A사가 이번 딜을 저희 경쟁사에 주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홍콩의 투자은행 마케팅팀 헤드를 국내로 불러들이고, A사의 오너와 미팅을 주선하였습니다. 소위 막판 뒤집기 전략을 짠 것입니다. 다행히 저의 전략이 적중하여 다음날 오너와의 미팅이 잡혔고 홍콩에서 오는 마케팅 팀 헤드는 급작히 비행기를 잡아 타고 날아 들었습니다. 때마침 호텔 방을 잡지 못하여 평소부터 잘 아는 호텔 세일즈 우먼을 몰아 부쳐서 그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윗 룸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할인하여 겨우 방을 잡았습니다. 그 다음날 미팅에서 홍콩에서 온 마케팅팀 헤드는 A사 오너와의 담판에 성공하였고 저희는 결국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마음 졸이고 조마조마하였던 것은 결코 유쾌하지도 않았고, 다시 경험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천규덕 선수도 어쩌다 한 번은 어려운 경기를 막판 뒤집기로 이기는 것을 보여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경기를 너무 자주 하는 것은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하기만 하였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사람이니 그 분은 더 이상 막판 뒤집기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막판 뒤집기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처음부터 넉넉히 여유 있게 우세한 경쟁을 즐길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Post Covid 19- 2020. 6. 19.  (0) 2020.06.19
상속세- 2020. 6. 12.  (0) 2020.06.12
수익증권- 2020. 5. 29.  (0) 2020.05.29
COBRA - 2020. 5. 22.  (0) 2020.05.22
트로트- 2020. 5. 15.  (0) 2020.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