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돌발 상황- 2020. 9. 4.

jaykim1953 2020. 9. 4. 05:30

나이 든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나이 든 사람 티를 내려는 것인지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오늘도 옛날 이야기로 시작해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그 당시에 갓 개국하였던 동양 TV가 있었습니다. 처음 개국할 때에는 D-TV 동양방송이라고 부르다가, 뒤에 중앙일보와 합병하여 단일 법인으로 합쳐지면서 이름을 중앙방송으로 바꾸었으나 KBS측에서 중앙방송이라는 이름이 혼선을 야기한다는 이의를 제기하여 다시 TBC 동양방송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동양방송이 첫 방송을 내보낸 것이 1964년 연말 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TV 방송이 KBS한 군데뿐이었고, KBS는 공영 방송으로서 요즈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근엄한(?) 방송 무드를 보였습니다. 쇼 프로그램도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은 아나운서가 나와서 ‘다음은 OOO씨가 나와서 XXX 곡을 부르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점잖게 진행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주말에 진행되는 쇼의 이름은 ‘OB 그랜드 쇼’ 였고, 스폰서는 OB맥주, 진행은 당대 최고의 아나운서였던 고(故) 임택근 아나운서였습니다. 후에 이름은 ‘그랜드 쇼’로 바뀌기도 하였으나 진행 방식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양방송이 생기면서 주말이면 ‘쇼쇼쇼’라는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코메디언 고 곽규석씨가 사회를 보면서 시작 무대에서 여자 무용수들과 함께 춤도 추고, 노래 사이사이에 가벼운 꽁트를 진행하는 포맷으로 바뀌었습니다. 근엄함과는 거리가 먼 진행 방식이었습니다.

주중에도 오락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김동건 씨가 사회를 보는 ‘힛 게임 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청백 양 팀으로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경쟁하면서 게임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각 팀에는 응원단장이 있었고, 응원단장으로는 그 당시 두 사람이 콤비로 자주 출연하던 송해 씨와 고 박시명 씨가 맡았습니다. 이따금 사회자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응원단장 송해 씨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프로 레슬러 김일 선수의 박치기를 흉내내며 사회자에게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조금은 무질서하고 뒤죽박죽인 진행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존의 틀에 박힌 오락 프로그램의 진행 방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치밀하지 못 하였던 그 당시의 프로그램 준비 상황이 들통 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힛 게임 쇼에 외국에서 온 백인 여성 한 사람이 출연하였습니다. 사회자가 간단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한국에는 처음 왔는가, 한국의 인상이 어떤가 하는 식의 틀에 박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백인 여성이 상당히 미인이라고 칭찬을 하면서 남자들이 청혼을 하거나 데이트 신청을 하지는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전문 통역사가 아닌 프로그램 진행을 담당하던 플로어 (floor) PD 였던 L 씨가 나와서 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자의 마지막 질문은 전혀 준비가 안 되었던 질문이었던지 갑자기 우물쭈물하면서 통역을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사회자가 ‘Propose 받았었냐고 물어보면 안 될까요?’라고 수습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통역을 하던 PD가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안 될지…’ 하면서 버벅였습니다. 결국은 사회자가 ‘이만 간단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라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또 한 번 통역의 준비가 부족한 일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에 있었던 일입니다. 가수 겸 개그 맨, 사회자로 활약하던 I 씨가 여자 아나운서 한 분과 사회를 보던 늦은 밤 연예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마침 하와이에서 민속 무용단이 내한하여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였습니다. 간단한 시범 무용이 끝나고 남녀 사회자 두 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무용의 동작이 의미하는 것이 있는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자 무용수가 ‘yes’ 라고 말하면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한 쪽으로 비스듬히 뻗으면서, ‘It means sun.’이라고 하자, 사회자는 ‘예 이 동작은 태양을 의미한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여자 무용수가 손을 허리 높이 정도에서 손 바닥을 아래로 향한채로 물결치듯 움직이며 옆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녀는, ‘It means sea wave.’ 라고 하였고, 사회자는 ‘이 동작은 바다 물결이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는 여자 무용수가 어깨 높이 정도로 손을 올리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로 다시 물결치듯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It is breeze.’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갑자기 ‘어…. 어….’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자 아나운서가 재빨리, ’바람 아닐까요…’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회자 I 씨가, ‘바람은 wind 아닌가요?’ 라고 여자 사회자에게 되물었습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더라면 여자 사회자가 통역을 한 것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더 이상 인터뷰는 진행이 안 되고 얼버무리면서 당황스러운 순간은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전체 진행 상황을 정리한 큐 쉬트 (cue sheet)를 준비하여 진행자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준비한 대로 진행합니다. 흥미와 재미를 위하여 엉뚱한 상황을 연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모든 프로그램은 큐 쉬트에 적힌 대로 진행하고 사전에 충분한 리허설(rehearsal)을 통하여 돌발 상황의 발생을 방지합니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와 사전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큐 쉬트가 있는 방송과는 달리 자유로운 대화가 이어지는 회의에서의 통역은 쉽지 않습니다. 그 날 회의에서 이야기 될 안건에 대하여 미리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완벽하게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통역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만 한 일입니다. 저도 간혹 회의, 또는 면담 석상에서 통역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경험담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국내 생보사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외국의 대형 투자은행 (Investment bank) 아시아 지역 책임자 부회장이 제가 일하는 회사의 CEO를 면담하러 왔습니다. 제가 배석을 하였고 통역을 할 사람을 따로 두지 않고 필요한 경우 제가 통역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간단히 사업 얘기를 마치고 면담의 끝 마무리 즈음에 외국 투자은행 부회장이 ‘한국의 주식시장을 어떻게 전망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한창 맥 없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어 언제 시장이 되살아 날는지 앞이 보이지 않던 때입니다. 그러자 저의 회사 CEO는, ‘허어… 이거 참, 그냥 다 팔고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라고 운을 떼고는 잠시 생각을 하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의 통역을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통역을 시작하였습니다. ‘Well, I am not in a position to say ‘sell everything and leave the country.’’ 그러자 투자은행 부회장은 크게 웃으며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겠다. 솔직히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CEO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간혹 통역을 하다 보면 통역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하는 영어를 알아들었다며 직접 답변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흔치는 않지만 이런 경우에 사달이 나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쯤 전의 일입니다. 국내 대기업 K사가 해외에서 2천 만 달러의 전환사채를 발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여러 투자은행들이 K사를 찾아가 자기 은행을 주간사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외국 투자은행도 K사에게 똑같은 요청을 하였습니다. 저는 홍콩에서 온 저의 보스를 대동하고 K사의 사장님을 면담하였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홍콩에서 온 저의 보스는 간단히 그린슈 프로비젼 (Greenshoe provision)도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린슈 프로비젼이란 유가증권의 발행시장에서 수요가 예상보다 매우 클 경우에 예정된 발행 물량보다 최대 15% 까지 추가 발행할 수 있는 옵션을 주간사에게 주는 것을 말합니다. (관련내용: investopedia.com_greenshoe) 이는 주간사 입장에서는 추가 발행을 통한 추가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충분한 수요를 시장에서 끌어 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린슈 이야기를 듣고 K사의 사장님은 통역이 필요 없다고 손을 젓더니 대뜸, ‘우리 회사의 사색(社色)은 과거에는 녹색(green)이었으나 이번에 로고를 바꾸면서 파란 색으로 바뀌었으니 프로비젼은 파란색으로 하자고 해 주세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린슈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프로비젼(provision, 잠정조치)과 프로스펙터스(prospectus, 증권발행 설명서)를 혼돈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황급히 K사 사장님에게 그린슈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행여 기분 나쁘지 않게 조심조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K사 사장님은 크게 불쾌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 당시에는 해외 증권 발행 금액은 재무부 허가 사항이었으므로 아무리 수요가 많다고 하더라도 허가 받은 금액을 초과하여 발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원천적으로 그린슈 옵션은 해당사항이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형태의 돌발 상황을 마주치게 됩니다. 저도 그랬고 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돌발 상황이 발생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뿐 아니라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들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도 모두 현명하게 잘 대처해 나가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