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아무도 모르게.... - 2020. 11. 27.

jaykim1953 2020. 11. 27. 05:15

다음 사진을 기억하십니까?

 

이 어린이는 1962년 가을 실종된 조두형입니다. 1958년생이였으니 당시 나이는 만 4세였습니다. 이 어린이가 실종된 이후 유괴범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부터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도 있었고, 그의 지시대로 부모가 돈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도는 굉장하여 당시의 대통령격인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도 성명을 통하여 유괴범이 자수하면 선처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습니다. (관련기사: 박의장 유괴범 불처벌 지시_1963_5_27_경향신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두형은 끝까지 찾지 못하였고 유괴범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조두형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은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누가 조두형을 유괴하였는지, 또는 조두형이 언제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안타깝기만 한 일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렇게 안타까운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으므로 인해서 조용히 상황이 마무리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우리나라에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융사(金融史)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라면 역시나 1997년의 외환 부족 사태에 따른 IMF 구제 금융 요청 사건일 것입니다. 국가의 금고가 비어서 부도의 위기를 직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사건 훨씬 이전에 이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겪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1980년 우리나라가 사상 유래 없는 역성장(逆成長)을 경험하던 때의 일입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당시 상황은 매우 급박하고 어려웠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 규모는 미화 50억 달러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국내에서는 정계의 불안정이 이어지고 있었고, 국외에서는 제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원유가격이 20%가 넘게 오르면서 우리나라 경제에 찬 물을 끼얹는 듯 하였습니다. 게다가 1980년부터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시작되면서 미국 달러화 이자율은 연 20%를 넘어섰고, 달러화 환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미국 달러화에 대한 서독 마르크 화의 환율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2대 1을 돌파하였습니다. 미화 1 달러당 2 마르크가 채 안 되었던 환율이 2 마르크를 넘어섰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게는 원유가격, 이자율, 환율의 세 가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밀어닥친 것이었습니다. 원유 수입 대전도 한 번에 5백만 ~ 1 천만 달러의 규모로 미국 달러화가 필요한데 국내 외환 보유고는 불과 50억 달러 수준이고, 그나마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직접 처분이 가용한 외화는 불과 수천 만 달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외환 시스템은 중앙집중제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국내 거주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외화 자산을 중앙은행에 집중하여 보고하고 처분에 대한 인증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외환 보유고에는 국내 기업, 금융기관 등이 가지고 있던 외화자산이 모두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보유한 외화 자산을 제외하고 한국은행이 직접 처분 가능한 외화 자산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외환 거래 규모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세(?)하고 미미하였으나,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외환 보유고는 그나마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할 정도로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한국은행의 미국 달러화 잔고가 채 일천만 달러도 안 되는 경우도 발생하는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1997년의 외환 위기 때에는 우리나라의 외환 보유고의 위기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고, 정부는 어쩔 수 없이 IMF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1997년의 외환 위기보다 더 심각하였던 1980년의 위기는 어떻게 넘겼을까요? 그 당시의 상황은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1980년은 정치 사회적으로 우리나라가 매우 혼란하였던 시기였습니다. 1980년 6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5. 18 사태 등으로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국보위 의장이 외국은행 지점장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장충동에 있는 호텔에 외국은행 지점장 5~6 명이 불려 갔습니다. 그 때의 국보위는 무소불위의 기세등등한 기구였습니다. 외국은행 지점장들을 모아 놓고 국보위 의장이 그들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첫째는 정국은 안정되어 가고 있으니 걱정 말고 계속하여 우리나라 경제에 도움을 주기 바란다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우리나라의 외환 상황이 매우 불안한데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강구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부탁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에 하던 비즈니스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탁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소위 빅 3 (big 3) 외국은행은 미국의 씨티(Citi) 은행, Bank of America, Chase Manhattan Bank 였습니다. 이들 세 은행의 지점장이 모여 상의를 하고 각 은행으로 돌아가서 자기 은행의 담당 직원들과도 상의를 하였습니다. 아무도 뾰족한 대책을 내지 못하는 가운데 씨티 은행에 근무하던 한국인 가운데 C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C는 당시에 외국인 자금담당 책임자 바로 밑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한국인 직원들 가운데에서는 자금 분야에서 가장 선임자였습니다. 그는 머리가 좋고, 시장 관련 지식이 풍부하여 씨티 은행에서는 상당히 신망이 높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20. 1. 17. 참조) C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     외국은행이 달러화를 차입하여 들여와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원화를 대가로 달라를 팔고 미래에 되사는 외환 스왑(swap) 거래를 한다.

   2.     스왑 거래로 한국은행은 달러화 자금을 차입하고 한국 원화를 빌려주는 효과가 발생한다.

   3.     외국은행은 스왑 거래를 통하여 생긴 한국 원화로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통화안정증권을 매입한다.

   4.     통화 안정 증권의 만기는 스왑 거래의 만기와 일치 시킨다.

   5.     이 거래를 통하여 외국은행에게 연 1%의 수익을 보장해 준다.

 

실제로 당시에는 외국은행이 한국은행과 스왑거래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 외환이 부족할 때에 외국은행들이 제안하여 실행하고 있던 거래 방법이었습니다. 한국은행이 각 외국은행별로 한도를 정하여 주고 그 한도 안에서 스왑 거래를 하여 원화 자금을 확보하고 그 자금으로 국내 기업에게 대출을 하여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왑 거래 한도를 그냥 증액 시켜주게 되면 그 결과 외국은행의 국내기업에 대한 여신이 늘어나게 되어 통화량 팽창이 유발됩니다. 한창 인플레이션이 심하던 시기에 통화량이 증가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때였으므로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스왑 한도를 늘리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왑 한도를 늘리더라도 스왑 거래를 통하여 유발된 유동성을 통화안정증권을 통하여 다시 중앙은행으로 흡수할 수 있다면 통화량 팽창이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외국은행 지점장들은 이러한 내용을 국보위에 건의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즉시 한국은행으로 전달 되었고 검토를 거쳐 바로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그 당시 약 2~3 억 달러의 스왑 자금이 새로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조성된 외화자금으로 우리나라는 소리 소문 없이 외환보유고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은행의 입장에서는 국내에 달러 자금을 들여와서 이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 빌려주고 그 댓가로 한국 원화 자금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원화 자금으로 한국은행이 발행한 통화안정증권을 매입합니다. 모든 리스크가 한국은행으로 집중됩니다. 즉, 국가- 중앙은행 리스크를 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면 가장 신용도가 높고 믿을 만한 대상은 정부 또는 중앙은행입니다. 그러므로 외국은행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신용을 가지고 있는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거래를 하면서 연 1% 라는 수익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의 외환관리와 외국은행의 비즈니스와 리스크 관리라는 면에서 서로에게 윈-윈 (win-win)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외부에 노출 시키지 않으면서 외환 보유고의 문제를 단 칼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당시의 언론에는 이러한 금융 거래의 내용이 전혀 보도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10년 후 언론의 사설에 외국은행의 스왑에 대한 코멘트를 하며 중앙은행이 외국은행 지점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미국의 금융시장 공세에 대한 우려_한겨레_1990/11/14)

조두형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외환 보유고 관련 어려움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해결 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안정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이를 특별히 공포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특별히 알려지지 않으면서 아무도 모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될 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