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불실기업- 2023. 10. 6.

jaykim1953 2023. 10. 6. 07:39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새로이 정권을 잡은 군부 출신의 정부는 느닷 없이 ‘不實企業 整理’ 라는 기치를 들고 기업들을 옥죄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 정부 정책의 희생양으로 국제그룹이 해체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관련기사: 국제그룹정리-매일경제-1985. 2. 21.) 그런데 이 당시 ‘不實企業整理’ 라는 한자어를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이 주목 받았습니다. 그 때의 최고 권력자가 이 한자어를 ‘불실기업 정리’라고 읽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방송에서 ‘不實企業’을 ‘불실기업’이라고 읽어야만 하였습니다. 신문 등 활자 매체에서는 한글 표기를 삼가고 모두 한자로 ‘不實企業’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不實企業’은 한글로 ‘부실기업’이라고 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자가 ‘불실기업’이라고 읽자 이를 시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모두 권력층의 눈치만 보면서 따라서 ‘불실기업’이라고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는 이를 ‘불실기업’이라고 읽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들 제대로 ‘부실기업’이라 읽습니다. 한자어를 읽는 요령이 매우 ‘부실’하였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 용어의 읽기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국제 그룹의 회사를 정리하면서 가장 앞세운 명분이 ‘경영상태와 재무 상황이 매우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국내 기업들의 상황은 대개 비슷비슷하였고 국제그룹만이 특별히 상황이 나빴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주거래은행이 계속하여 자금 지원을 하여 주느냐 여부에 따라 기업의 사활이 달려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여느 재벌 기업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주거래은행의 지원이 없이는 어느 기업도 스스로 버텨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독 국제그룹이 부실그룹 정리의 대상이 되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 그 당시 경제계 인사들의 분석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기까지는 그 동안 열악한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도 기업을 이어온 기업인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여 준 정부의 지원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장기, 저리의 금융 지원’과 정책적 지원을 바탕으로 커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보험사들에게 적용하는 지급여력 비율을 과거에 적용하였더라면 아마도 어떤 보험사도 고객에게 보험 상품을 팔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엄격한 자본비율, 부채비율 등을 적용하였었다면 그 당시의 기업들은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열악한 우리나라의 기업 풍토와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업을 꾸려나가려는 기업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성장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창업하여 한 때 우리나라 재벌그룹의 서열에서 최상위권에 있었던 기업의 창업주 K회장은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서도 공무원, 주거래 은행 임직원, 거래선 등과 관계를 돈독히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K회장보다 10여 년 선배 되시는 기업인 한 분이 K회장을 일컬으면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K회장은 고향이 어딘가? 태어나기는 대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부산은 6.25 전쟁 때 피난 가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제 2의 고향이라고 하고, 서울은 피난 후 올라와서 학교를 다니며 성장한 고향이라고 하고, 인천은 사업을 하며 공장을 찾아 다니던 사업의 고향이라고 하니 도대체 진짜 고향은 어디인가?”
K 회장이 전국의 모든 도시를 다 마음의 고향이고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 곳 출신의 인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잇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보입니다. 이렇다할 기업으로서의 바탕이 취약하고, 재정적으로도 넉넉치 않은 가운데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 나가야 하는 기업가로서는 상대방과 끈끈한 연대를 만들려면 지연(地緣)을 어떻게 해서라도 이용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K회장은 정부의 정책을 최대한 잘 이용하였습니다. 수출 드라이브를 거는 정부의 정책에 호응하여 수출 물량을 늘려 나갔으며, 그로부터 수출 금융을 최대한 끌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호응한 반대급부로 당시에 어려움을 겪던 여러 부실기업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인수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K회장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회사는 무역업을 하는 모기업 하나뿐이고 나머지 계열사 기업들은 모두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그룹을 이루었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2019. 12. 20. 참조)
그런가 하면 K회장보다 3살 아래인 또 다른 기업의 C회장도 부실기업 인수를 통하여 기업활동을 하였던 분입니다. C회장은 자신의 부친이 세운 정유산업의 기업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기업의 경영이 어렵게 되자 자신의 매형에게 그 기업을 매각합니다. 그리고 남겨진 계열사를 중심으로 다시 사업을 일으켜 제약(製藥), 자동차 수입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넓혀 갑니다. 그리고는 약 20년 전 재무상태가 극도로 취약해진 한 손해보험사를 인수합니다. C회장의 계획은 이 손해보험사를 변화와 혁신을 통하여 소위 turn around (탈바꿈)시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인수합니다. C회장의 생각은 이 손해보험사를 일순에 turn around 하여 재무상태를 개선하면 기업가치가 크게 오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이 기업을 높은 가격으로 다시 매각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C회장의 계획대로 되어 가지 않았습니다. 이 손해보험사는 재무상태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본을 확충할 요량으로 몇몇 사모 펀드와 손잡고 증자를 하는 과정에서 이 손해 보험사는 대주주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서민금융기관 연합회로 넘어갔으며 아직도 재무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시장에 매물로 계속 나와 있는 상태입니다. C회장이 인수한 이래 이 손해보험사는 한번도 부실기업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부실기업이 건실한 기업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였습니다.
그 반면 건실한 기업을 정부가 나서서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어 다른 기업에 강제 인수시킨 사례도 없지 않습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철강 기업 가운데 손꼽히는 대기업이었던 U철강이 있습니다. 이 기업은 사주(社主)의 외화 밀반출을 빌미로 정부가 나서서 지분을 강제 매각하여 국제 그룹에게 인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1980년대에 국제그룹이 ‘불실기업’으로 몰리게 되자 U철강보다 규모가 작은 철강회사에 다시 인수되었습니다. 그 당시 시장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었다’는 가십이 오갈 정도로 정부의 막강한 입김으로 인하여 건실한 기업이 ‘불실기업’이라 낙인 찍히고, 그 부실기업이라는 오명으로 인하여 덩치 큰 회사가 더 작은 규모의 회사에게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 U 철강은 몇 차례 이름이 바뀌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U철강의 창업주는 1970년대에 자신의 딸이 암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서 치료를 받도록 하였으며, 그 딸의 치료비 명목으로 거액의 외화를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이것이 당시 최고 권력자의 귀에 들어가면서 정부의 입김으로 기업을 빼앗기다시피 하였습니다. 창업주의 아들은 저보다 한 살 아래인 제 또래의 해외 유학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겠다며 U철강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다가 결국에는 현재의 U철강 대주주에게 U철강의 지분을 모두 넘기고 맙니다. 지분을 넘기기 전 U철강 창업주의 아들은 U철강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면서 수많은 국내외 자본가들과 펀드들을 접촉하여 자신과 연합하여 U철강을 인수하겠는지 의사를 타진하고 다녔습니다. 저도 그의 그러한 움직임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의 계획은 때로는 치밀해 보이기도 하였으나 어딘가 엉성한 구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자본가도 선뜻 나서서 그와 손 잡으려 하지 않았고, 어떤 펀드도 그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흔히 사모 펀드라 불리는 프라이빗 에퀴티(Private Equity)는 성격상 건실한 기업을 인수하기 보다는 어딘가 부실한 구석이 있는 기업을 인수하여 그 부실한 면을 고치고 보강하여 기업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리고 나서 가치가 높아진 기업을 더 높은 가격에 되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것이 프라이빗 에퀴티의 사업 방식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U철강은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건실한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니 프라이빗 에퀴티가 나서서 인수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부실기업이 발생하면 정부가 나서서 그 부실기업을 우량한 재벌기업에게 떠넘기곤 하였습니다. 사실은 부실기업을 떠맡은 재벌기업도 그리 크게 우량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부의 명분은 부실기업을 우량기업에게 맡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부실기업의 처리 방법은 시장에 부실기업을 매물로 내놓아 프라이빗 에퀴티라던가 부실기업 거래 전문 펀드들에게 인수를 시킨 뒤 그들로 하여금 기업가치를 높이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금융기관을 프라이빗 에퀴티에게 넘겼다는 근본적인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부실기업으로 꼽힌 제일은행을 뉴 브리지 캐피탈이라는 프라이빗 에퀴티에게 넘기고 뉴 브리지 캐피탈이 제일은행의 가치를 높여서 되판 것은 부실기업의 처리에 관한 교과서에 실릴 만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에 부실기업이 생길 가능성은 많이 있습니다. 부실기업의 처리에 시장 논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원칙이 적용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