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I am 신뢰에요 - 2023. 11. 3.

jaykim1953 2023. 11. 3. 06:41

흔히 하는 말로 요즘 뜨는 핫(hot)한 말이 있습니다. “I am 신뢰에요.”
앞 뒤 글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무슨 말인지 해석이 잘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I am OO에요.”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광고문구에도 “I am 특가(特價)에요”라는 문구를 사용할 정도입니다.
이 말을 사용한 원조(?) 인물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너도 나도 “I am…”을 아무 곳에서나 사용합니다. 이 말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말이 되지 않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자신은 마치 한국말이 서툰 미국 출생자인 듯이 행동하려고 영어를 섞어 쓰려 했지만 어려운 단어는 모두 한국말로 하고 자신이 영어로 할 수 있는 쉬운 단어만 영어로 쓰다 보니 이런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전청조, 한국말 서툰 척 'I am 신뢰'…_sedaily.com_2023. 10. 29.)
이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곳은 뉴욕이고 자신이 미국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이 행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미국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말이 서툰 재미교포들은 쉬운 말은 한국말로 하고, 어려운 단어를 영어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재미교포가 맞는다면 ‘신뢰(信賴)’와 같이 비교적 어려운 단어는 한국말로 하지 못하고 ‘I am’과 같이 쉬운 말은 오히려 한국말로 합니다. 아마도 “나는 reliable” 혹은 “나는 creditworthy”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우리 말이 서툰 외국 교포, 또는 우리 말이 서툰 척하는 정체불명의 교포들이 과거에도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 보겠습니다. 약 25년 전 우리나라가 보유 외환이 바닥이 나면서 경제 위기를 겪고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던 소위 IMF 경제위기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에 국내 일류 호텔의 커피 숍에는 혀를 유난히 굴리면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외국의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하는 자칭 금융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한 방에 자신이 해결해 줄 듯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실제로 외국에서 살면서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말처럼 정말로 스스로가 금융계의 거물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과장되고 허황된 이야기를 하기 일쑤였습니다. (금요일 모닝커피- 컨설팅 비즈니스 단상- 2011. 9. 16. 참조) 영어가 엉터리이던가 아니면 금융 경력이 미덥지 못하던가 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한가지 또는 둘 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가 고문으로 일하던 토지공사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잖이 찾아왔었습니다. 그 가운데 청와대 출입 기자였었다는 A 씨가 재미교포 P와 또 다른 외국인 한 사람을 동반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대출을 연결해 주는 대출 브로커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미국 달러화 자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건이 좋았습니다. 대출은 수 억 달러, 최장 20년까지 가능하고 대출 상환은 토지공사가 원하는 시기에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주(貸主)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아마도 ‘대주’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았던지 A 씨는 P에게 “대주가 누굽니까?”하고 물었습니다. P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A 씨와 저를 쳐다보면서 “What is 대주?”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시큰둥하게 답했습니다. “대주 is creditor.”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P는 금융을 전문으로 하였다는 자칭 금융 전문가가 ‘creditor’라는 아주 기본적이고 쉬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되물었습니다. “Is creditor the one evaluating credit?” 즉, creditor란 신용을 평가하는 기관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creditor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때다 싶어 동행한 외국인에게 물었습니다. “Do you know who the creditor is going to be?” (당신은 누가 creditor가 되는지 압니까?) 그러자 이 외국인도 creditor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멀뚱멀뚱 저와 A, P 세사람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쉬운 말로 고쳐서 알려 주었습니다. “Creditor is the lender.” (Creditor는 돈 빌려주는 사람입니다.)
그제서야 P는 자신의 무지가 드러났다는 것을 눈치 채고 말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은 마케팅을 주로 하는 salesman이다 보니 금융 전문 용어에 익숙치 않고 돈을 빌리는 고객 중심으로 쉬운 용어만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주는 자신들과 거래하는 여러 금융기관 가운데 조건을 조율하여 적당한 곳과 연결하여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다시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출 조건에 대출 상환 시기를 토지공사가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grace period는 얼마까지 가능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Grace period는 상환 유예 기간, 흔히들 거치(据置) 기간이라고 부르는 대출 관련 용어입니다. 그런데 P는 grace period라는 또 다른 기초적인 용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P는 횡설수설하면서 답변을 제대로 못하였고, 제가 다시 외국인에게 grace period는 얼마나 줄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그도 답변을 못하고 눈치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답변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는 것을 본 토지공사의 직원들은 A 씨에게 정중히 거절의 뜻을 전달하고 미팅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무리 청와대 출입기자 출신의 A 씨가 동행하였다 하더라도 P는 기본적인 금융 용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바람에 그가 의도하였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기대한 미팅의 결과는 “I am 신뢰”였겠지만 결과는 “I am 불신(不信)”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특히나 금융기관은 여수신(與受信)을 업(業)으로 합니다. 신용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업종입니다. 그런데 신뢰가 무너지면 업의 기초가 흔들리게 됩니다. 아무리 입으로 “I am 신뢰에요”라고 외쳐 보아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국내 기관 투자자를 찾아 다니면서 영업 활동을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국내 공제회 가운데 몇 곳을 찾아 다니면서 파생상품을 소개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개하는 상품을 저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금융기관에서 경쟁적으로 팔고 있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등을 하는 금융기관은 성공적으로 상품을 팔겠지만 2등과 그 이하의 금융기관은 노력한 대가를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1980년대 중반 저는 국내 자동차 회사 K사와 하루에 외환 거래 6천만 달러를 하는 등 K사 와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K사와 가장 많은 거래를 하는 외국은행으로 손꼽히기도 하였습니다. K사의 새로운 공장 준공식장에서는 단상의 귀빈석에 초대받아 장관급 인사들과 같은 열에 앉는 융숭한 대접도 받았었습니다. 그 때는 제 입장에서는 K사에게 “I am 신뢰에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 5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K사에게 거래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안서를 낸 직후 시장 상황이 급작스레 크게 변하면서 제가 제안서에서 제안한 가격이 시장에 비하여 말도 안 되게 나쁜 가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다음 K사와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지난 번 제안서를 보낸 이후 시장 가격이 너무 많이 변하였고 지금 거래를 한다면 훨씬 더 좋은 가격에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K사의 담당자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저에게 “시장이 바뀌었는데도 전화를 안 주시길래 이 거래를 할 의향이 없으신 줄 알고 다른 은행하고 거래를 하였습니다.” 라고 통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저는 “I am 불신에요”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는 이차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얼마나 전문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섣부르게 “I am 신뢰에요”라고 말한다고 하여서 더 신뢰가 가는 것도 아니고, 영어를 잘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사기성이 농후한 어설픈 젊은 사람의 한 마디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동안 저 자신도 혹시라도 어쭙지 않은 영어를 쓰면서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지나 않았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