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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짚고 헤엄치기- 2024. 1. 19.

jaykim1953 2024. 1. 19. 05:58

외국어를 하다 보면 이따금 표현 방식은 달라도 내용은 우리말과 너무나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전 TV에서 출연자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Grass is greener on the other side of the fence.” 직역하면 ‘잔디는 담장 너머 (옆 집에) 더 푸르게 잘 자란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 속담에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아마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만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의 눈에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도 똑 같은 내용의 속담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 언론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대학의 명예 교수하는 분이 기고한 글인데 제목에 “땅 짚고 헤엄치는 은행”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관련기사: 늘 땅짚고 헤엄치는 은행… ELS·펀드 손해, 왜 고객만 피해보나-chosun.com- 2024. 1. 8.) 아마도 이 분의 눈에는 우리나라 은행들은 땅 짚고 헤엄치듯 쉽게 돈을 버는 것으로 보인 모양입니다. 다른 기업들은 어렵게 돈을 버는데 은행들은 손쉽게 돈을 버는 것으로 보이나 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은행 영업은 땅 짚고 헤엄치듯 쉬워 보였나 봅니다. 게다가 앞에 ‘늘’ 이라는 표현을 덧붙인 것을 보면 ‘은행은 항상 손쉬운 장사만 한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위험 ELS 발행이 반복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상품을 사는 고객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피해를 있다. 은행은 반대로 상품을 팔면 팔수록 이득이 커진다. 은행이 판매하는 신종자본증권도 마찬가지다. 신종자본증권은 30 만기 후순위 채권으로 ()고위험 증권이다. 은행은 ELS 신종자본증권도 높은 이자를 미끼로 던지면서 고객을 고위험 상품으로 끌어들이고 수수료 수입을 얻는다.
이 분의 주장은 은행이 왜 고위험 상품을 고객에게 파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객의 입장에서는 낮은 이자율에 불만을 가질 수 있고 이런 고객들이 고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수익을 쫓아서 고위험 상품을 살 수도 있습니다. 저도 은행에서 ELS와 같은 기관용 투자상품을 개인 고객에게 판매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반대할 뿐 아니라 극도로 혐오합니다. 그러나 낮은 이자율에 만족하지 못하는 은행 고객들에게 ‘High Risk High Return’ 상품을 소개하는 것은 전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다만 고객에게 이 상품의 리스크를 정확하게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은 금융기관의 몫입니다.
최근 문제가 된 홍콩의 H지수 연계 ELS 상품을 판매할 때에 리스크를 설명해 주는 과정에서 ‘홍콩 주가지수가 지금보다 30% 이상 떨어지지만 않으면 안전하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이러다 5조원 날릴 판…홍콩 ELS 반토막 악몽 현실화-hankyung.com- 2024. 1. 14.) 이는 ELS를 매입한 고객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판매 은행에서는 ‘홍콩 주가지수가 지금보다 30% 이상 떨어지면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라고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대화 내용을 녹음하지 않았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으나, 사실은 두 주장은 같은 내용을 자신의 입장에서 더 강조한 것일 뿐 크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손실을 입게 된 고객 입장에서는 은행에서 상품을 판매하며 ‘안전하다’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반면 판매사인 은행의 입장에서는 고객에게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고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 컵에 물이 반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물 컵이 반이 비었다’ 라고 하는 것과 ‘물 컵이 반이 차 있다’ 라는 것 같아 보입니다. 설사 고객의 주장대로 은행이 ‘주가지수가 30% 이상 떨어지지 않으면 안전하다’ 라고 말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주가지수가 30% 이상 떨어지면 안전하지 않다’ 라는 말을 내포합니다. 은행 고객이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그 정도의 이해력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이 리스크를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은행의 고객들은 애를 씁니다.
앞의 기사에서 또 한 가지 문제 삼은 것은 수수료입니다;
고객이 1억원을 맡기면 은행은 1.5% 수수료 150만원을 먼저 떼어 간다. 은행은 실제로 잔액 9850만원으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 기관에서 매입해 고객에게 판매한다
사실입니다. 고객이 별도의 수수료를 따로 지급하지 않는다면 은행은 판매 수수료를 고객의 돈에서 떼어서 수수합니다. 이는 거의 모든 금융 상품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고객이 보험에 가입하면 보험 프리미엄에는 각종 수수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판매 수수료뿐 아니라, 계약 유지 비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금액이 얼마인지 고객에게 일일이 까 밝히지는 않습니다. 수수료가 없다면 금융 기관은 상품을 팔아 봐야 수익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상품을 판매하기 위하여 고용된 직원의 봉급도 지급하여야 하고, 금융기관의 점포도 유지하여야 합니다. 그런 비용에 충당하고 남는 금액은 금융기관의 수익이 됩니다. 제가 누누이 이야기하였지만 금융기관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이익 조직(profit organization)입니다. 결코 자선 단체(charity mission)가 아닙니다. 이익이 나야 계속 영업을 할 수 있고 고객에게 서비스도 계속 제공할 수 있습니다. 수수료 없이 금융 상품을 팔기 원하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에게 이익을 남기지 말고 상품을 원가에 판매하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금융기관에 지급하는 수수료가 정말로 아까워서 지급하지 못하겠다면 고객이 스스로 상품을 만들어 내면 됩니다. 사실 ELS라던가 기타 여러 파생 금융 상품들은 기본 상품으로 채권이나 주식 등을 매입한 다음 그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옵션을 매입하거나 매도하여 구성합니다. 고객이 직접 이러한 상품을 구성할 수 있다면 구태여 금융기관에 수수료를 지급하면서 금융 상품을 매입하지 않아도 됩니다.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의 원가에 커피를 끓이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과 수익을 더하여 커피 가격을 받듯이 금융기관도 수수료를 받음으로써 금융기관의 수익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커피를 끓여 마시면 더 싼 비용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듯이, 고객 스스로 금융 상품을 설계하고 구성하면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고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기사에서 은행의 영업을 ‘땅 짚고 헤엄치기’ 라고 표현한 것은 몹시 불편합니다. 남이 하는 사업은 쉬워 보일는지 모르겠으나 막상 자신이 달려들어 해 보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은행 영업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은행들이 문을 닫았고 또는 다른 금융 기관에 팔려 나갔습니다. 은행 영업이 그렇게 땅 짚고 헤엄치듯이 쉬운 것이었다면 문을 닫은 은행들의 경영진은 땅 짚고 헤엄도 치지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남의 사업을 그렇게 평가절하하는 것은 대학교수로서 할 일은 아닌 듯이 보입니다.
저도 은행에서 저의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첫 직장이 Bank of America 서울 지점이었습니다. 은행에 입행한 첫날 받아 본 교재- Training Manual은 두껍기도 하였지만 내용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의 교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일 수는 있어도, 남의 하는 일이 땅 짚고 헤엄치기 하듯 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