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모닝커피

지미 카터 전대통령- 2025. 1. 10.

jaykim1953 2025. 1. 10. 06:05

지난 해 연말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 전대통령이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관련기사: ‘美 최고 전직 대통령’ 카터 별세… 정치서도 도덕 추구한 기독인-kmib.co.kr- 2024. 12. 30.) 미국 시간으로 오늘(1월 9일)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그가 최고의 대통령이라느니, 인권을 지켰던 지도자, 인류애에 넘치는 사람 등 여러 가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떠나간 고인을 추모하였습니다. 일단 고인이 되면 떠나간 사람에 대하여서는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고 좋았던 부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지미 카터 전대통령이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우호적인 생각보다는 원망과 분노가 차오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아마도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대하여 그리 좋은 인상을 가졌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던 1977년은 우리나라가 월남으로부터 철군한 이후 중동의 건설 경기에 영향을 받아 해외 건설 경기가 살아나면서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말을 자주 듣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과 그에 대한 지미 카터 대통령의 시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유추해 보면;
1975년 월남전이 종전되면서 우리나라는 월남에 파병하였던 병력을 철수하였습니다. 월남전 당시 파병되었던 한국 군인의 월급은 미국이 지급하였고, 이 월급의 50 – 70%를 우리나라 정부가 가져가고 나머지 금액만을 군인들에게 지급하였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 영향을 받았던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이 치르는 월남전에 용병을 파견하고 그 대가를 정부가 착취하는 것으로 인식하였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인식을 저변에 깔고 그가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정부는 군인 파병을 대가로 나라 재정을 메꾸어 나가는 한심한 나라로 비추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월남전이 끝나고 중동에서 건설 붐이 불면서 이번에는 노동자를 사막의 뙤약볕에 파견하여 인건비를 착취하는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계획 경제를 운용하면서 인권 탄압을 일 삼는 후진국가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재임시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철군 계획은 그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 싱글러브 주한 미군 참모장으로 인하여 변경되었습니다. 싱글러브 장군도 지금으로부터 3년 전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터에 반기, 주한미군 철수 막은 싱글러브 영면-seoul.co.kr-2022. 8. 22.)
일부에서는 지미 카터의 철군 계획에 협조하였더라면 싱글러브 장군은 별 두 개 쯤은 더 달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싱글러브 장군은 “내 별 몇 개를 수백만명의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일갈하였습니다. 싱글러브 장군이 세상을 떠났던 2022년 1월 저의 페이스 북에 그의 영면을 아쉬워하는 글을 제가 올렸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JayKim53/posts/1/31/2022 참조) 그러자 저의 페이스 북 친구 한 사람이 이런 답글을 올렸습니다. “Jay, if he opposed Carter he must have been a brilliant general!” (재호, 그가 카터에게 반기를 들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뛰어난 장군이었겠네!) 물론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겠으나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지미 카터를 평가하는 데에 조금은 인색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미 카터를 정말로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일종의 립 서비스로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기는 하나, 그가 생전에도 그렇게 칭송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미 카터 전대통령의 사후 국내 언론에서도 그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없지 않았습니다. (관련기사: 카터의 NYT 친북 기고문에 발칵 뒤집힌 워싱턴 정가_chosun.com_2025. 1. 5.)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그가 대통령에 재직중일 때에는 인권 문제를 빌미로 미군 철수라는 압박을 하였었고, 퇴임 후에는 1993년 북한에 의한 첫 핵 위협이 발생하자 다음 해인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경수로 발전소를 건설하여 주면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하겠다는 김일성의 약속을 받아내고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로 인하여 KEDO (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가 주축이 되어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그 비용은 대부분 우리나라가 부담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수로 건설 도중 북한의 계속적인 핵개발이 발각되었고, 발전소 건설은 중단되었습니다. 발전소 건설에 투입된 자금과 비용은 지금도 미결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관련기사: KEDO 경수로사업 공식종료 .. 한전 청산비용 2억달러- hankyung.com_ 2006. 6. 1.)
지미 카터 전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 핵개발의 중단을 약속 받았다며 우리나라에게 그 대가로 경수로 발전소를 건설해 주도록 하였으나,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핵개발을 지속하면서 지미 카터의 공언은 허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재임시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에 대하여서는 칼 같은 잣대로 비판을 하였으나, 정작 북한에 가서는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외교적인 부담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더니, 전직 대통령으로서 큰 부담이 없는 상태에서는 북한의 인권에 대하여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은 해비타트(Habitat) 운동이었습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는 운동입니다. 지미 카터 전대통령은 퇴임 후 해비타트 운동을 통하여 봉사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에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의 후임으로 그의 재선을 실패하게 만들었던 레이건 (Ronald W. Reagan) 전대통령이 어려운 경제 여건을 극복하고 인플레이션을 잡았다는 혁혁한 성과에 대비되어서 더욱 박한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미 카터 전대통령으로서는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재직시에 하필이면 1973년에 시작한 첫번째 원유 위기(First Oil Crisis)부터 계속 이어진 경제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제2의 원유 위기(Second Oil Crisis)까지 겪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 경제 운용이 쉽지 않았음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임이었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은 과감한 고이자율 정책을 밀어 부쳐 인플레이션을 잡고 경제를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더라면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루어 놓았던 업적과 같은 성공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미 카터 전대통령은 경제 정책에서는 실패하였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가 나름 인권을 내세우며 윤리적인 정치를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윤리적인 정치는 크게 기억되지 못하고 경제에서의 실패가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미군 철수 위협과 김일성의 대변인 역할을 해준 무능한 전직 대통령으로 더 강한 인상을 남겨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