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꼭 기억하여야 할 것들과 기억할 필요가 없는데도 기억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번호는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군번은 반드시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저처럼 병역근무를 마친지 50년이 되어 가는 사람에게는 군번은 거의 기억할 필요가 없는 숫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군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필 남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군번을 기억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그런데 저는 특이하게도 다른 사람의 군번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대한 것이 1977년 5월이니 만 49년 전에 제대한 군대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군번은 제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의 부대장 군번입니다. 대령 이O호, 120XXX - 저의 부대장 계급 성명 군번입니다.
제가 1974년 11월에 입대하여 전반기 6주, 후반기 14주 군사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 받은 것이 1975년 2월입니다. 그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약 2년 3개월 동안 제가 가장 많이 하였던 일 가운데 하나가 비밀 열람 기록부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군대에서는 비밀 문건을 금고에 보관합니다. 그리고 비밀 문건을 꺼내 올 때 마다 보관 장부에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각 비밀 문건의 뒤에는 비밀 열람 기록부라는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금고의 장부에 특정 날짜에 인출된 기록이 있으면 해당 문건의 뒤쪽 비밀 열람 기록부에는 그 날짜에 누가 보았는지 계급, 성명, 군번을 기록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의 부대장은 매일 아침이면 필요한 비밀 문건을 인출하여 올 것을 지시합니다. 그러면 금고에 가서 기록을 남기고 비밀 문건을 가져옵니다. 일과 시간에 비밀 문건을 열람하고 일과를 마치기 전에 금고로 반납합니다. 그런데 반납하기 전에 비밀 열람 기록부에 기록을 하여야 합니다. 저의 부대장은 하루에도 십여 건, 많을 때에는 수 십 건의 비밀 문건을 꺼내 와서 열람합니다. 원칙적으로는 매 비밀 문건마다 부대장이 직접 비밀 열람 기록부에 자신의 계급, 성명, 군번을 기록하여야 하지만 실상은 이를 부하 병사들에게 지시합니다. 매일 일과 마칠 때 쯤이면 저는 부대장이 열람한 비밀 문건들의 비밀 열람 기록부가 기록되었는지 점검하고 기록이 안 되어 있으면 제가 기록하여 넣었습니다. “대령, 이O호, 120XXX” 이 기록을 하루에도 십여 건 이상씩 매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대장의 군번을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었고,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15년 동안 타던 제 차를 바꾸었습니다. 새 차를 타고 외출을 하여 친구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약속 장소에 이르러 차를 발레 파킹에 맡겼습니다. 친구와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 발레 파킹 직원이 제 차 번호를 물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제 차 번호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발레 파킹 직원이 돌아와서 그런 번호의 차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라며 “무슨 말이에요 내가 타고 와서 여기에서 차를 맡겼는데.”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발레 파킹 직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찾아보겠다고 하고 돌아 갔습니다. 잠시 후 그 직원은 다시 돌아와서 또 다시 차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제 머리를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 차량의 번호를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차를 바꾸었는데 제 머리 속의 기억에는 아직도 예전 차량의 번호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직원에게 사과하면서 제가 차를 최근에 바꾸어서 순간적으로 착각하였다고 말하고, 새 차 번호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차를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이 날 차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과거 군대에서 외웠던 부대장의 군번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불과 열흘도 되지 않은 새 차의 번호는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예전 차량 번호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마도 사람의 기억은 선택적으로 잘 기억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뉘는 모양입니다. 기억하여야 할 것과 기억이 필요 없는 것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래 동안 저절로 잘 기억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뉘는 모양입니다.
제가 이 칼럼을 써 온지 벌써 만 15년이 되어 갑니다. 대부분의 칼럼 내용은 저의 기억을 바탕으로 써 왔습니다. 그 기억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제대로 검증을 해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제가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을 인용하였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도 않았고, 또 끌어 내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누구나 다 또렷이 잘 기억하는 오래된 기억도 있을 것이고 최근의 사건도 씻은 듯이 잊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것은 꼭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잠시 예를 들면;
조선건국 1392년, 콜럼부스의 아메리칸 대륙 발견 1492년, 임진왜란 1592년, 동로마 제국 멸망 1453년, 삼일운동 1919년…..
부대장 군번 120XXX, 부대장 차량 1라X658 크라운 승용차,
Bank of America 서울지점 ID number 6070,
Bank of America 과거 쌘프란씨스코 본점 주소 555 California St. San Francisco, CA
제가 살던 쌘프란씨스코 아파트 주소; 2200 Sancramento St. San Francisco, CA
파리바 은행 서울지점 트레져리 직통전화 번호; 02-736-8539
그 밖에도 불필요한 잡다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컴퓨터의 메모리 정리하듯 저의 기억 속의 메모리도 정리할 수 있다면 불필요하게 저의 기억 용량만 잡아먹고 있는 기억들을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것이 가능한 날도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아무리 불필요하다 하더라도 그저 불필요한 기억의 편린(片鱗)으로 한 구석에 남겨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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